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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대감 재방문
곰팡이 카스테라에서 성수라테까지

이토록 감정적인 조선, 본 적 있소? 유교국가 감정 정화 일대사건

by stephanette

'혈맹 3 대감'을 알현하러 사랑채를 다시금 들렀는데...


릴리시카: 대감, 그간 별고 없으셨오?


대감: 아니, 그렇게 뜯어말렸는데도 기어이 이 사달을 내셨오.


릴리시카: 무슨 말씀이 온 지, 소녀 모르겠사옵니다.


대감: 아니 그 흉측하다고 소문난 거 있지 않습니까? 호환보다 무섭고 마마보다 두려운.


릴리시카: 그래도 모르겠사옵니다.


대감: 사람 피를 바짝바짝 말려 죽인다는... 어허... 답답한지고. 어째 이리 모르시나 글쎄.


릴리시카: 그게 뭡니까?


대감: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야겠소? 여봐라~ 누구 거기밖에 아무도 없느냐~


구름이: 예~ 여기 구름이 대령했습니다.


대감: 그래, 너라도 한 번 말을 해보거라. 그 흉측하고 무섭고 두려운 것 있지 않느냐.


구름이: 아~ 곰팡이 카스테라 말씀입니까? 대감님?


대감: 그래, 그래, 그거 말이다. 아니, 여보시게 그 이야기는 왜 또 썼는가?


릴리시카: 소녀, 곰팡이가 피었길래 피었다 했사온데, 피었는데 아니 피었다고 해야 한단 그 말입니까?


대감: 어허!! 또 그런 발칙한 말씀을 하십니까. 때가 어느 때인데.


릴리시카: 때가 어느 때라니요. 오늘은 곰팡이 카스테라 퇴치 기념일이죠.


대감: 아니, 그걸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단 말입니까? 입에 담기도 더러운 이름을, 절대 아니 됩니다.


릴리시카: 대감, 소녀 그 곰팡이 장례를 치루어서 어찌나 뿌듯하던지. 이 소녀의 즐거움을 어찌 그리도 몰라주시는 겁니까?


대감: 아니 됩니다. 전국 유생들에게 서한을 보내서 상소문을 올리라 하겠습니다. 그리 알아 두시오.


릴리시카: 아니, 대감, 이곳에는 비단처럼 하늘하늘하고 수묵화처럼 잔잔한 그런 글만 올려야 한다시더니, 이제는 상소문입니까?


대감: 엄연히 유교국가인데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글로 써서 남긴단 말입니까. 다른 양반들도 모두 반대할 것이오. 다들 불편하다 하지 않소.


릴리시카: 유교국가가 어때서요? 심장에 곰팡이가 피어서 퇴치법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구름이, 옆에서 얌전히 곰팡이 스케치 중이던 붓을 뚝— 떨어뜨리며 조심스레 입을 뗀다)

구름이: 대감님, 송구하오나, 말씀 중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대감: 허허, 이놈이 다 컸구나? 어디 말해보거라.


구름이 (쭈뼛거리며): 그 곰팡이 카스테라는 비단 릴리시카 폐하의 감정만은 아니옵니다.
도성 사람들 심장 안에도, 보기 싫다고, 냄새난다고 덮어둔 감정이 펑— 부풀어 오르곤 하옵니다.

헌데 폐하께선 그걸 부끄럽다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꺼내어 볕에 말리셨사옵니다.
그게 얼마나 용감한 일이 온 지… 저는, 부디 대감께서도 이해해주셨으면 하옵니다.”


(잠깐 정적)


릴리시카 (잔잔히 웃으며): 대감, 곰팡이도 피우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라면, 그 얼마나 반듯하고 고귀하시었는지 소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곰팡이가 한 번쯤 피어봐야, 그걸 닦아낸 손끝이 진짜로 따뜻해지는 법 아닙니까.


대감:…읏. 그건 또. (눈썹을 찡그리며) 말은 참, 고약하게 잘하시오…


구름이 (작게 중얼거리며): 저… 대감님도 사실 어릴 적 곰팡이 카스텔라 한 조각쯤…
드셔보셨을 텐데…


대감: 뭣이?!! 이놈아 나는 이 날 평생 살면서 그래본 역사가 없다!

(잠깐 눈을 돌리고 한숨)…소싯적에… 조금… 있었…을지도.


대감:…나는 말이오, 평생 감정을 들키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왔소.
양반 가문 체통에, 사내 체면에…하지만 말이오…이 늙은 심장에도 곰팡이 낀 자국이 있다는 거…

오늘 처음 인정하오.”


릴리시카 (잔잔히 커피를 내리며): 대감, 참으로 용맹하십니다. 그려.

그럼 그 기념으로 오늘 한 잔 하시지요, 제가 준비했습니다. 곰팡이 퇴치 기념— ‘성수 라테’이옵니다.
어차피 낙관을 찍는 이는 독자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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