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이의 욕망을 정하는가 – 르네 지라르로 읽는 교육의 희생양 구조
르네 지라르(René Noël Théophile Girard)는 말했다.
“인간의 욕망은 자율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것을 따라 원하게 된다.
"그가 원하니, 나도 원한다."
이것이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의 핵심이다.
교육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은 순수하게 배우기 위해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정해둔 ‘성공의 욕망’을 모방하러 온다.
그리고 그 욕망의 끝은 항상 똑같다.
명문대, 대기업, 스펙, 안정성.
그 욕망은 누구의 것인가?
아이의 것이 아니다.
부모의 욕망이고,
사회 전체가 아이에게 주입한 욕망의 클러스터다.
지라르에 따르면,
사회가 위기에 처하면 공통의 희생양을 찾아내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그 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반복한다.
성적이 낮은 아이는 "게으른 아이"가 되고,
다른 길을 찾는 아이는 "일탈자"가 된다.
아이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를 품은 부모, 가정 전체가 낙인을 뒤집어쓴다.
모든 아이가 같은 욕망을 향해 가야 하고,
그 욕망에서 벗어난 아이는 교육이라는 종교의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다.
이 얼마나 잔혹한 제의(祭儀)인가.
(*2023년 서울 합계출산률, 9년 만의 ‘상승’이라지만 의미는 참담하다.)
이 모방 욕망의 사회에서
누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하겠는가.
지금의 교육은 더 이상 성장의 공간이 아니다.
부모의 미완의 욕망이 전이되는 전장이 되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희생양을
이 가혹한 구조 속에 던지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 사회는
자기 자신을 희생양 삼으며 서서히 붕괴 중이다.
지라르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희생양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사회는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진짜 교육이란,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기 욕망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
성공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아이를 인정해주는 것.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우리 아이는 성적이 안 오르지?”
→ “왜 모두가 같은 꿈을 꿔야 하지?”
→ 아니, “왜 ‘입시에 적합한 꿈’으로만 채워야 하지?”
지금 우리는
모두가 같은 욕망을 복제하는 체계 안에 있다.
그 결과는?
사라지는 아이들.
줄어드는 출산.
붕괴하는 사회.
출산률 저하는 단순한 경제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욕망의 구조가 무너졌다는 신호다.
우리는 아직,
우리 아이에게 자기 욕망을 가르쳐 본 적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교육에 실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