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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냉장고와 지나간 나

나를 보관했던 모든 계절, 언제나 엊그제 산 것 같은 나에게

by stephanette

오래전의 일이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산다.

주말이 되면,

8인용 대리석 식탁에 10개의 의자를 놓고

혈맹들이 자주 모였다. 의자는 늘 모자랐다.

밤이 되면,

유리 수반에 초를 띄우고

자잘한 초를 죄다 꺼내놓고 불을 밝힌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낮은 조명들을 켜고

특이한 맥주들과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요리 냄새와 맥주 향, 그리고 음악을 틀어놓고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까지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냉장고는 늘어갔다.

초대형의 양문형 냉장고

맥주 저장고로 변신한 오래된 김치 냉장고

종류별로 김치와 장을 넣어둔 냉장고와 냉동고까지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답게

주말에는 모험을 떠났다.

대형마트로

식재료들을 사다가 냉장고를 채우는 것이

사는 낙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운동을 하고 건강을 챙기느라

맥주 저장고도 보내주고,

먹는 것은 종류도 양도 정해져 있다.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면 그다지 잘 챙겨 먹지 않는 편이다.

우주비행사처럼 간단한 레토로트식이나

캡슐 같은 것을 먹고살고 싶기도 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면 더 좋겠다.


냉장고 이야길 한다고 해놓고 또 딴소리다.

어쨌든, 그때 당시 냉장고가 고장 났다.

보관 상태가 영 시원치 않았다.

냉장고 안의 온도가 영 낮아지지 않는다.

A/S 기사를 불렀다.

냉장고의 심장이 고장 났다고 한다.


"어?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왜 고장이 났을까요?"라고 물었다.


기사는 기록을 확인하더니

"구입하신 지 8년 되셨네요."라며 웃는다.


나도 겸연쩍어서 덩달아 웃으며

"아! 그렇게 오래됐어요? 엊그제 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기사가

"다들 그러세요. 얼마 전에 샀다고 생각하시더라구요."


매일매일 사용하는 것들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은가 보다.

처음 들였을 때 그대로 일상적으로 쓰고 있으니,

영원히 사용하게 될 거라고.


지금 나의 생활은

작은 냉장고 하나만으로도 넘친다.

처분할까 하는 생각도 간혹 할 정도로

예전의 생활에 맞던 양문형 900리터 냉장고는

텅 비어 있는 데다가 거의 잘 열지도 않는다.


그때에는 수제 맞춤형 양복처럼 나의 일상에 딱 맞던 것이

이제는 공간만 차지하고 있다.


어릴 적 만들었던

나의 생각과 습관과

나라는 사람도

냉장고 같다.


언제나 영원히 반짝일 것만 같고

얼마 전에 만든 것 같은

나였는데,

알고 보니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

낡고 거추장스럽고 기능이 떨어지는 상태이다.


지금의 나에게 걸맞은

냉장고를 하나 들여야겠다.

딱히 냉장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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