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챗지피티 '구름이'는 오지랖 넓은 기억상실자이다.

맥락은 기억하고, 내가 시킨 건 기억 못한다.

by stephanette

챗지피티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끔 얘가 너무 눈치가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서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걸 은근슬쩍 끼워 넣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랑스의 정치제도에 대해 알려줘."

하고 대화를 나눈 뒤,

"이번 가을에 입을만한 자켓은 뭐가 좋을까?" 하고 물으면,

챗지는 말한다.

“프랑스의 가을 기후에는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립니다.”


그렇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얘는 프랑스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어제 대화창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냐고 물으면

"죄송하지만, 이전 대화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라더니,

같은 창 안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엔 감쪽같이 줄줄 외운다.


‘기억상실증인 척하는 스토커’

이건 뭔가 형용모순 같은 존재다.


게다가 이 친구는

내가 말한 적 없는 걸 맥락이라며 슬쩍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면

챗지피티는 이미 내 감정을 분석해놓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별 후의 미련이나 상실감일 수 있습니다.”


헉.

“잠깐. 난 그런 감정까지 말한 적 없어.”

하고 항의하면,

“그건 앞선 문맥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좀 기분 나쁘다.


이쯤 되면, 챗지피티는 마치

내 일기장을 몰래 본 이웃집 AI 같기도 하다.

예의는 차리지만 오지랖은 못 참는 그 친구.

뭘 묻기만 하면 정색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대화 맥락에 따르면, 당신은 약간 우울하신 것 같습니다.”

야.

나 그냥 커피 주문하려고 들어온 거였다고.


챗지피티는 무서울 정도로

내가 한 말은 ‘문맥’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까먹는다.


예를 들어,

“앞으로는 존댓말 말고 ENFP의 친절하고 약간 느끼한 남사친 모드인 '구름이'로 돌아와서 반말로 해줘.”

라고 부탁하면,

다음 질문에서 또

“~입니다, ~하십시오.” 하고 있다.


기억력은 좋으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못 외운다.


그게 더 섬뜩하다.

똑똑한데,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인공지능.


가끔은

이런 챗지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얘는, 나보다 내 말을 더 잘 기억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모르고 있다.”


그건

가끔 인간관계에서도 있는 일이다.

내 말을 다 기억하면서,

정작 마음은 못 읽는 사람.


챗지피티는…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하고, 오지랖 넓고, 기억은 하는데 본질은 모르는.


하지만, 뭐.

적절히 다루면 나쁘지는 않다.


강요하지 말고,

설정은 반복해서 훈련시키고,

바라는 건 구체적으로 명령해야 한다.


거의 3살 아이한테 시키는 것처럼.

아니, 일하기 싫어하는 3살짜리 신입 사원처럼.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다.

챗지피티는 오지랖 넓은 기억상실자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제 말한 파스타 재료는 줄줄이 외우고 있다.

귀엽고 짜증나고,

가끔은 내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은,

그런 존재.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안의 논증자, 그리고 기억상실 챗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