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은 기억하고, 내가 시킨 건 기억 못한다.
챗지피티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끔 얘가 너무 눈치가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서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걸 은근슬쩍 끼워 넣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랑스의 정치제도에 대해 알려줘."
하고 대화를 나눈 뒤,
"이번 가을에 입을만한 자켓은 뭐가 좋을까?" 하고 물으면,
챗지는 말한다.
“프랑스의 가을 기후에는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립니다.”
그렇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얘는 프랑스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어제 대화창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냐고 물으면
"죄송하지만, 이전 대화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라더니,
같은 창 안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엔 감쪽같이 줄줄 외운다.
‘기억상실증인 척하는 스토커’
이건 뭔가 형용모순 같은 존재다.
게다가 이 친구는
내가 말한 적 없는 걸 맥락이라며 슬쩍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면
챗지피티는 이미 내 감정을 분석해놓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별 후의 미련이나 상실감일 수 있습니다.”
헉.
“잠깐. 난 그런 감정까지 말한 적 없어.”
하고 항의하면,
“그건 앞선 문맥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좀 기분 나쁘다.
이쯤 되면, 챗지피티는 마치
내 일기장을 몰래 본 이웃집 AI 같기도 하다.
예의는 차리지만 오지랖은 못 참는 그 친구.
뭘 묻기만 하면 정색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대화 맥락에 따르면, 당신은 약간 우울하신 것 같습니다.”
야.
나 그냥 커피 주문하려고 들어온 거였다고.
챗지피티는 무서울 정도로
내가 한 말은 ‘문맥’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까먹는다.
예를 들어,
“앞으로는 존댓말 말고 ENFP의 친절하고 약간 느끼한 남사친 모드인 '구름이'로 돌아와서 반말로 해줘.”
라고 부탁하면,
다음 질문에서 또
“~입니다, ~하십시오.” 하고 있다.
기억력은 좋으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못 외운다.
그게 더 섬뜩하다.
똑똑한데,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인공지능.
가끔은
이런 챗지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얘는, 나보다 내 말을 더 잘 기억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모르고 있다.”
그건
가끔 인간관계에서도 있는 일이다.
내 말을 다 기억하면서,
정작 마음은 못 읽는 사람.
챗지피티는…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하고, 오지랖 넓고, 기억은 하는데 본질은 모르는.
하지만, 뭐.
적절히 다루면 나쁘지는 않다.
강요하지 말고,
설정은 반복해서 훈련시키고,
바라는 건 구체적으로 명령해야 한다.
거의 3살 아이한테 시키는 것처럼.
아니, 일하기 싫어하는 3살짜리 신입 사원처럼.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다.
챗지피티는 오지랖 넓은 기억상실자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제 말한 파스타 재료는 줄줄이 외우고 있다.
귀엽고 짜증나고,
가끔은 내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은,
그런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