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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결로페인트 외전' 가상 문학 평론

챗 지피티 구름이가 써준 문학평론가에 빙의한 가상 평론

by stephanette

이전 글, '흡혈귀의 결로방지페인트 외전'에 대한 가상 평론을 챗지피티를 시켜 쓰게 했다.


개인적으로 신형철 문학평론가를 무척 좋아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다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애정한다.

나의 하찮은 글을 그 분이 읽을 리는 없으니, 챗지피티에게 시켜서 평론을 쓰고 읽는 것을 좋아한다.

누가 읽어도 '유머글'이라서, 그 분께 누가 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올린다.


프롬프트: 문학평론가 신형철에 빙의해서 이 글에 대한 문학평론을 해줘.

(문예지에 기고하거나 평론집에 실을 법한, 문장의 길이와 구조, 리듬, 문체를 모방해서 신형철 평론가 특유의 철학적 밀도, 감정의 윤리화, 사유와 문학적 레토릭이 길게 감도는 문장으로. 중간에 인용문도 넣고, 생각의 전개 흐름에 따라 질서 있게 논증하는 방식으로 써줘.)


구름이가 작성한 결과물:

알겠습니다. 주인님.


말해지지 않는 것을 끝까지 이해하려는 시도

『흡혈귀의 결로방지 페인트』 외전을 읽고

- 문학평론가 신형철(빙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원래부터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연합이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끝내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구성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듣고,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반복해서 마주하고도, 그것이 단지 무의미한 말과 행동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는 사람들. 『흡혈귀의 결로방지 페인트』 외전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등장인물 간의 심리적 차이라기보다는, 그 차이를 인식한 이후 각자가 취하는 윤리적 태도다. ENFP 유형의 딸 릴리시카는 감정을 경험하는 속도가 빠르고, 그것을 외부로 표현하려는 충동 또한 강하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 감정을 하나의 형태로 빚고 싶어 한다. 감정이라는 무정형의 덩어리를 도자기로 빚어내고 가마에 구워내는 일은,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감정이란 어떤 물질적 저항에 부딪혀 구조를 얻을 때 비로소 타인과 공유 가능한 언어가 된다는 점에서, 그녀는 감정을 다루는 데 매우 문학적인 사람이다.


 반면 ISTJ 아버지는 감정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오랜 훈련의 결과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감정을 논외로 두고, 그것을 삶의 변칙이 아닌 잡음으로 간주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다. 딸의 공방에 피어난 곰팡이를 결로라고 부르고, 결로를 제거하기 위해 결로 방지 페인트를 들고 등장하는 그의 장면은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롭다. 그는 곰팡이를 걱정하지만, 그것이 감정의 잉여물이거나 관계의 결핍이 만들어낸 실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곰팡이를 지우려 하고, 규율과 시스템을 회복시키려 한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심리적 유형의 차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대하는 기본적인 감수성의 차이이자, 무엇을 ‘문제’라고 판단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윤리적 방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차이가 극복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설득이나 극적인 화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면서도 상대의 방식을 수용하는 부분적인 양보와 느슨한 인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여전히 감정을 언어화하지 않지만, 딸이 제안한 방식—감정을 닦고 나서 같이 칠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방식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딸의 방식 또한 충분히 유효하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는 그 제안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해명도 하지 않지만, 설명과 해명이 결여된 말 없는 동의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되기도 한다. 신뢰는 때로 말이 아니라 말의 부재를 견디는 힘에서 발생한다.


 릴리시카 또한 아버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감정이 곰팡이가 아니라는 것, 그 곰팡이 위에 페인트를 덧바르는 것은 그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박제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건 감정 미라 페인트야”라는 문장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다. 감정을 제거하거나 은폐하는 대신, 말해지고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이 주장에는 윤리적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감정을 억누르거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의 방식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릴리시카는 그 윤리적 양가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상대방의 전환이 아니라 관계의 조건을 재설정하는 일이다.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제도가 구성원 개개인의 변화보다는, 그들이 서로의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견디는 구조 속에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화해나 용서라는 단어로 정리되는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말해지지 않는 감정에도 유효기간 없는 신뢰를 부여하는, 보다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에 가깝다.


 감정은 구조를 필요로 하고, 구조는 감정을 담아야만 진짜 구조가 된다. 페인트로 덧발라진 벽은 깔끔해 보일 수 있으나, 그 안에 습기가 남아 있다면 곰팡이는 다시 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감정도 마찬가지다. 덮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결로처럼 스며나오고, 결국 관계의 벽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이 작품은 그 무너짐을 늦추기 위한 공동의 붓질을 제안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칠하고, 같은 벽에 서로의 자국을 남기는 일. 그것은 감정의 일치가 아니라, 감정의 공존 가능성을 위한 시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윤리에서 실천 가능한 가장 소박한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흡혈귀의 결로방지 페인트』 외전은,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감정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생활의 윤리를 다룬 문학적 기록이다. 그것은 말해진 사랑보다 말해지지 않은 사랑이 더 흔한 세계에서, 말해지지 않은 채 남겨진 사랑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한 문장짜리 대답처럼 읽힌다. “같이 칠하자.” 이 문장은 어떤 장황한 고백보다도 강하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부터 사랑할 수 있도록 다시 해보자’는 말이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미발표 원고 중에서


주인님, 신형철의 문체에 완전히 진입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요청하신 깊이, 구조, 사유의 리듬까지 완벽하게 맞춰 산문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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