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고민하는 너에게_ 결혼 전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
고민 3. 결혼식과 혼인신고를 해야만 결혼생활이 가능할까?
결혼에 대한 세 번째 고민은 결혼식이나 혼인 신고와 같은 제도에 대한 고민이었다.
두 번째 고민이 해결이 된 것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긍정적 검토
난 여전히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고, 아마 죽을 때까지도 완전한 인격체로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난 여전히 내가 알아낸 결핍과 알아내지 못한 나의 결핍을 탐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에 비해 크게 현명해졌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완전한 삶을 살면서
스스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의 존재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치유와 화해가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반감은 확실히 감소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의 불완전함과 나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약간은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결혼 전후의 문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결혼은 나에게 친숙한 과정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가족에 대한 나만의 개념은 아직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않다.
게다가 결혼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가 접했던 수많은 정보들과 지식들, 친구들의 진술(?)들이 합쳐져
나는 이미 결혼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와 형식은 나에게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단 30분 만에 끝나는 결혼식에 비해 결혼식 전 후로 너무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야 했다.
결혼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의 문제도 찾아왔다.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여성들은 출산 육아 자체에 대한 고민은 물론,
그로부터 파생되는 경력단절에 대한 고민도 함께 시작해야 했다.
동시에 몇몇 친구들은 경력단절과 출산 및 양육을 동일 선상에 놓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아이가 생겼는데 기쁘지 않은 자신,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아이가 미친 듯 예쁘지 않은 자신을 죄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바로 나와 남편이 아닌 나의 가족과 내 남편의 가족이다.
분명 그 가족들이 서로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나와 내 남편이 만나서 맞춰가는 것도 이리 어려운데,
내 가족과 남편, 나와 내 남편의 가족이 맞춰간다는 것은 더욱 힘들지 않겠는가.
아무리 훌륭한 시댁과 친정 가족이어도 분명 갈등의 소지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
서로가 조금씩 인정하고 이해하고 양보해야 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많은 친구들의 경우 시댁과 갈등이 없는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많이 배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스트레스 요소는 분명 있었다.
우리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하나의 문제를 양보하면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명절에 누구의 가족에게 먼저 갈 것인가가 해결이 되면,
가족 행사에 대한 문제가 튀어나오고,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등
결혼을 하지 않은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리고 가족의 특성마다 모두 다른 문제들이 하나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모두 애정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와 관심이겠지만,
사람에 따라 표현 방식도 다르고 또 받아들이는 스타일 또한 다르기 때문에
이는 결혼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문제들이다.
부부만의 규칙이 가족의 규칙이 될 수 있을까
결혼 전후로 부부는 규칙을 정해서 지킬 수 있고, 이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 역시 나의 파트너 하나일 뿐이다.
서로의 가족에게 부부의 규칙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이 규칙은 부부만의 규칙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리고 각자의 가족들은 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기가 어렵다.
만약 결혼을 기점으로 모든 가족(결혼이라는 제도로 결합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이 규칙을 철저히 인지하고 지켜준다면, 사실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규칙은 부부가 의논해 만든 규칙일 뿐,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만들어낸 규칙이 아니라면 사실 모든 가족이 이 규칙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단지 서로 배려해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가족과 가족이 결합되는 순간 한 부부는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했지만,
그 세계를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들만의 규칙을 지키고, 책임을 묻기가 참 어렵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에 나의 규칙을 강요할 수 없다. 그저 잘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30년 이상 꾸준히 자의식을 성장시켜온 나로서는 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물론 결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법 또한
내 머릿속에는 시뮬레이션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내 머릿속에 결혼은 단순히 부부만의 결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만의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함께 살고 싶었지만 결혼은 곧 죽어도 하기 싫었다.
B는 결혼을 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감당해야 할 수많은 스트레스 요인과 고민들이 먼저 압박으로 다가왔다.
결혼 이야기가 스치듯 지나갔을 뿐인데
부모님은 벌써 성격, 살 집, 현재 나의 상황에 대한 대책 등등을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나의 부모님도 벌써 이렇게 수많은 질문들을 해대는데 난 도저히 결혼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냥 둘의 세계를 구축하면 안 될까? 부모님에게는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정도로 해 놓으면
큰 기대 없이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당시 남자 친구였던 B에게 말했다.
B는 자신의 가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본다면서 기분이 상했다.
나는 누구에게나 가해의 요소는 잠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 역시 너에게 그럴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 부모님이 너에게 그러는 것을 막아낼 자신이 있다고,
난 우리 부모님을 애초에 차단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B는 원래 그런 것도 다 참아야 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것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은 스트레스받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자신에게 당연하다고 타인에게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당연히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이 타인에게도 스트레스 요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슈의 문제가 아닌 이슈와 파트너에 대한 태도의 문제
여기서 필요한 것은 문제의 발생 가능성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원인을 함께 고민해보거나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서
함께 논의해 보는 것이 필요했다.
아마 그 상황에서 B가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나는 아마 결혼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B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문제가 아니니 그것을 문제로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것이고 정이 없고 매몰찬 사람이었다.
B에게는 나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근거 없이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붙인 사람이고,
가족 간의 관심을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출산에 대한 이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임신을 하는 순간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 함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남자들은 여자들과 또 다른 측면에서 여자들은 전혀 모르는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임신 계획이 있는 여자들은 결혼을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경력과 육아 휴직 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구체적인 고민이 아니어도 막연하게라도 경력 단절과 육아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한다.
B는 남자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출산 및 육아 휴직, 그리고 여성의 퇴직에 있어서
부부의 경제적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에 함께 고민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임신과 출산에 있어 여성만이 고민하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B는 모두가 임신과 출산은 힘들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는 이슈라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주변 모두가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더불어 나의 이런 생각은 네 주변에 임신과 출산 후에도 부정적인 사람들만 있어서
네가 보고 배운 것이 그런 것이라며 내 주변 사람들까지도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물론, 부부에게 임신과 출산, 육아는 공동의 이슈이다.
만약 이것이 한 사람만의 이슈라면, 그 부부는 정말 건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임신과 출산을
직접 몸으로 겪어야 하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이슈와 감정적 압박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단순히 경제적 여건의 변화를 넘어
신체의 변화, 사회적 시선의 변화, 경력의 단절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이 이슈를 당연한 것이고, 가정을 이루어가는 데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이는 매우 예민한 이슈일 수 있다.
과연 B는 자신의 남자인 친구들의 아내와 여자인 친구들에게 이러한 이슈를 질문한 적이 있을까?
과연 B의 남자인 친구들은 아내가 경험하고 고민했어야 했던 이러한 이슈들을
잘 이해하고 이야기 나눈 후 결혼 전인 B에게 이야기 해준 적이 있을까?
이 이슈에서도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에 대한 다양한 방법들을 이야기 나누어 보는 태도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인지하지 못한 남자들의 문제도 분명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여성들이 결혼과 관련해 경험하는 이슈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두려워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확고하게 지금 나는 임신과 출산을 하고 싶지 않아 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함께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나는 아니고, 그 생각을 틀렸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할까.
고마워야 할 일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 싫다
이러다 보니 혼인신고, 결혼제도에 대한 나의 태도는 점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나에게 몰려온 상대방 가족의 기대는 그것이 애정이건 관심이건
스트레스 요인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 나의 파트너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아니라고 발을 뺀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는 이것을 혼자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의 며느리나 형님, 올케가 되고 싶지 않다.
영원히 여자 친구로 남아 그들의 기대를 피하고 싶다.
영원히 여자 친구로서 할 일만 하고 싶다.’
의 결론이 내려졌다.
결혼 제도로 묶이는 순간, 부부가 서로의 가족에게 애정과 관심으로 하는 행동들이
결혼 제도 내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당연해지는 것이 싫었다.
너는 나의 며느리니까, 너는 나의 사위니까, 너는 나의 매제니까,
너는 나의 형부니까, 너는 나의 올케니까, 너는 나의 새언니니까의 이유로
모든 것이 당연해지는 것이 지금도 싫다.
그래서 결혼 제도 없이 부부 둘만의 결혼 생활을 원했다.
서로의 가족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정말 노력과 애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려면
약간의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제도를 통해 가족이라는 경계 안으로 들어가면 달라지는 당연함이 나는 두렵다.
한 드라마 대사는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어머니,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어요.
만약에 어머니께서 늦게 들어온 딸을 위해 밥을 차려 주셨을 때,
딸이 반찬 투정을 하면, 어머니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다음번엔 무슨 반찬을 해줄까 하시겠죠?
하지만 며느리가 반찬 투정을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너는 가정교육을 그렇게 받았니? 하시겠죠?
딸과 며느리는 이렇게 달라요.”
같은 여자 사람인데 이렇게 다르다.
물론 모든 가정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자 친구이건 며느리이건 예의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 제도로 묶인 가족은 참 묘한 상황에 놓여 참 많은 기대 속에서
나의 노력이 당연한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는 여자도 그렇지만, 남자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스트레스 상황에 부부라는 두 사람이 놓이는 것이 싫다.
그러니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는 조금 천천히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둘만의 결혼’ 생활’은 성립이 불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Q of OUTRO
우리는 꼭 결혼’ 제도’를 거쳐야만 결혼’ 생활’이 가능한 것일까?
대체 ‘결혼’은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