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로마에 다시 돌아왔다.
20년 전 감동이 그대로 느껴질까?
피렌체, 베니스, 밀란은 20대 이후에도 여러 번 왔었다.
왜 로마는 다시 돌아오는 데 오래 걸렸을까.
코로나 시국 때 텅 빈 로마를 올 기회가 있었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삐 나섰다.
Roma Antica.. 로마 포럼. 그래 시작은 포럼에서부터지.
아침 일찍부터 수 백명의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듯한 콜로세움을 지나 로마 포럼에 가니 한적했다.
로마인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지였던 이곳. 살아있는 심장이자, 잔인함도 함께 했던 곳.
원래 늪 제대로 덮여 있었던 곳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개간되며, 포럼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후 천 년 넘게, 공공 생활의 중심지로 남았다.
전에는 카타쿰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번에 눈에 가는 곳은 타르페이아 바위 (헉.. 고대 로마에서 처형 장소로 사용됨)와 클로아카 막시마 (고대 로마의 하수도)였다.
로마 포럼에서 한 참 둘러보다가, 르네상스의 로마로 발길을 청했다.
여러 기념물을 지나 피아자 델 포폴로까지 걸었다.
로마에 며칠 없다면 바티칸에 가는 것보다, 이렇게 걸어 다니며 하나하나씩 보는 것을 추천.
피아자 델 포폴로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언덕을 올랐다.
내 목적지는 빌라 메디치였지만, 그 가는 길에 나무와 뷰에 이끌려 여러 번 앉았고
SPQR을 들으면서 갔기에 39도 육박한 날씨에도 지치지 않았다.
빌라 메디치.
이 언덕 위 빌라 메디치 땅은 유명한 여인, 네로의 사촌인 메살리나 가문이 소유했었다.
메살리나 또한 이 빌라에서 살해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도 한 페이지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이번은 생략.
그 후 1564년, 몬테풀치아노의 조반니 리치 추기경의 조카들이 이 부지를 구입했다.
그들은 피렌체의 나니 럽피 (건축가)의 지휘 아래, 빌라에 몇 가지 개조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니 리피는 곧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일을 진행한다.
그리고, 이 빌라의 대표적인 주인.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코시모 1세의 다섯째 아들)는
1574년에 이 빌라를 구입했다.
그는 또한 모든 니오베 조각상을 구입한 사람이다.
잠깐... 니오베는 누굴까?
그녀는 자신의 출산력 (다산)을 자랑하고, 그 에 답게 자식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자만은 신의 미움을 산다. 네토는 아르테메스와 아폴로를 시켜
화살로 니오베의 딸들과 아들들을 죽인 것.
비탄에 빠진 니오베는 다시 시필루스 산 (지금 터키에 위치)으로 도망쳤고 돌로 변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리고 그녀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자, 그녀의 돌같이 굳어진 얼굴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분수대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시필루스 산에는 실제로 여성의 얼굴을 닮은 자연 암석이 있으며,
이 암석은 "우는 바위"(Ağlayan Kaya)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빗물이 다공성 석회암을 통해 스며들기 때문.
페르난도가 산 네오베 조각 주변에는 아칸서스 덤불이 있다.
아칸서스 잎은 고전적인 기둥 장식에 늘 보인다.
즉, 식물 선택에서도 고대와의 연결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
이 빌라는 교황과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표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식물학, 연금술, 천문학, 점성술이 연구되었다.
빌라는 조각, 이국적인 식물과 동물들 (원숭이!)로 가득했다고 한다.
1801년 나폴레옹이 이 건물을 구입했고, 1803년에 빌라 메디치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의 본부가 돤다..
또한 프리 드 로마 수상자들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이 아카데미는 고대 클래식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오는 것이 표준이었던 예술가들을 환영하고 지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싱글 프랑스인 남자만이 입주 가능했다. 지금은 국적은 상관없지만 불어는 꼭 해야 한다.
(그래서 리셉션니스트도 불어를 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