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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비, 比) 행위는
선택행위이다.

-주역에서 본 생각거리 16

by 스테파노

만약 우울증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당신이 우울해하기를 스스로 선택했군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 사람이?! 내가 우울증을 선택하다니,

나는 우울증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죽고 싶은 마음뿐인데?’라며 당장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이론(글래서 등)에 따르면

사람은 마음에서 비롯된 동기에 의해 모든 행동을 선택한다.

심지어 불행한 일까지도 본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울증에 걸려 고통을 호소한다면

그런 증세를 유발한 선행된 행동이 있었으며

그 행동은 본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 행동에서 파생된 우울증도 선택된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선택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는 우울한 사람이에요.’라고 형용사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동사로 ‘나는 스스로 우울해하기를 선택했다.’라고

표현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선택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우울한 면만을 접근해서는 치유될 수 없으며

우울증을 유발한 근원적 행위를 직접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즉, 치유할 때 우울증 등 지엽적인 행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포함한 선택된 근원적인 전체 행동을

치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무엇이 근원적인 전체 행동인가?

주역(8-3)을 예로 들어서 보자.


서른 살이 넘도록 변변한 자리도 없이

하루하루를 서글픔에 빠져 지내는 비(比) 나라의 한 여성이 있다.

그 여성은 후배에게 책임자 자리를 빼앗겼다.


게다가 주변 분위기는 여학교처럼 여성만이 중심 된 문화여서

그 여성은 ‘능력도 없는 못난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놀림을 넘어서 입담이 험한 여성들 사이에서

매일매일 왕따로 괴롭힘을 당한다.


그 여성은 주역에게 하소연한다.

‘나의 사정을 잘 알잖아요, 이곳에서는 하루도 못 살겠음을,

능력도 없는 찌질이라고 왕따를 시키니…,

쉬쉬하며 자기네들끼리만 지내고,

이웃 세상은 내란 중이라 위험하여 겁나지만,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전에 이웃 세상에서 힘깨나 쓰는 실력자와 교분이 조금 있어

도움을 청하려고요.’라고.


이때 주역은 그 여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려 뽑아 따르는 사람이 도적 같은 사람이네요

[비지비인, 比之匪人].”라고.


여기서 비(比)는 ‘비교하다, 가려 뽑다, 대등하다, 따르다.’라는 뜻이다.

주역은 가려 뽑은 사람이 도적 같은 사람이라고

면 전에서 대놓고 직면 형식으로 말한다.


말하는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 보는 눈이 어째 그 모양인가?

기껏 고른 사람이 도적 같은 사람을 골랐으니, 원 참!’과 같다.


그 여성은 이웃 세상에서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위세가 드높은 사람을 만나려 한다.

마침 그 총사령관은 같은 여성인 데다

전에 교분을 쌓고 지내는 사이였다.


주역이 보건대,

그 여성이 기껏 고른 사람은

후일 왕당파가 득세하면 역모죄의 수괴로서

무서운 도적 같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처형될 것이 눈에 보인다.

그 연합군 총사령관은 왕이 싫어서 왕과 접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이론에는 공리처럼 말해지는 구절이 있다.

즉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라고.


그 여성은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단순히 교분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사심에 기울어진 선택을 하였다.

선택의 결과는 왕과 싸우는 연합군의 총사령관

즉 도적 같은 사람을 뽑았다.


주역의 말마따나 그 여성은 선택한 내용의 내막을 알게 되면

역모죄에 연루될 것이며

연루되었으므로 그로 인해 근심과 걱정으로 날을 세울 것이다.


만약 그때 그 여성은 근심과 걱정으로 우울한 증세로 커지면

그 여성은 우울한 증세만을 없애기 위해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울한 증세는 왕따 취급받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파생된 증세이며

결국 우울해하기를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우울증에 괴로워하는 그 여성을 구하려면

가려 뽑은 애초의 근원적 선택하는 행위로 돌아가야 한다.

뒤늦었지만 사심에 의해 총사령관을 선택한 것에 후회하고

그 총사령관이 무엇을 미끼로 던지든 간에

총사령관을 택한 선택 자체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주역은 그래서

‘가려 뽑아 따르는 사람이 도적 같은 사람.’이라고

근원적 선택행위를 잘못했다고

그 여성에게 가슴 불편한 진실을 얘기한다.


즉 그 여성은 가려 뽑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여기는데

주역은 도적 같은 사람이라고 모순상황을 얘기하고 있으므로

‘사람 보는 눈이 빵점에 가깝다고’ 얘기를 하니 불편할 수밖에.


주역은 그 여성의 근심, 걱정, 우울 등의 증세를

거론하며 최소한 위로의 말 등을 해줄 것 같지만

일부러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다.


왜? 주역은 상담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즉, 구구절절 늘어지게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가려 뽑은 사람이 도적 같은 사람’이란 한마디로

상담을 끝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사족(蛇足)으로

어렵게 직면시켰으면, 즉 충격을 주어 깨우치게 했으면

이후 그 여성은 스스로 통찰해서

갈 길을 터득해야 하니까.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란 말이

새삼 우리 가슴을 때리는 이유는 무언가?!


나 자신을 통제해서 올바른 길로 선택해야 하는데

통제치 못하고 그냥 사심에 기울어져

남들이 보는 그럴싸한 인물을 등에 업고 과시하려고

선택하고선 뒤늦은 후회를 하니….


요즈음 언론에 ‘우울증 갤러리’가 화제로 떠올랐다.

울갤(우울증 갤러리)에서는 ‘우울하다’라는 공통분모를 이용하여

젊은 미성년자들이 속앓이를 털어놓고

각종 정보를 공유하는 SNS상의 커뮤니티이다.


그러나 그 커뮤니티는 오프라인과 연계되어

각종 마약, 성폭력 등의 거래, 탐닉 등이

공공연하게 일어난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근원적인 문제인 우울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을까?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란 말에

답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러워도(예컨대 왕따로 힘든 생활을 하여도 등)

내 행동은 나만이 통제할 수 있다고 굳게 마음먹고

하나하나씩 이전의 잘못된 선택에 따른 행동을

뜯어고치는 수밖에.


과거의 선택을 되돌려 그때의 선택을 바꾸기란

자존심, 남들의 눈치 등으로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30%의 실책을 뒤늦은 감이 있어도 인정하고

나머지 70%는 근원적인 행위로 돌아가서

후회할지라도 뜯어고치는 것이 우울에서 해방되는 길일 것이다.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자는 나만이 유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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