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택(임, 臨)과 근심(우, 憂)

-주역에서 본 생각거리 17

by 스테파노

림(臨)은 ‘자잘한 것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에 직면하다, 비추어 밝히다’라는 뜻이다.

‘자잘한 것까지도 위에서 내려다보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어느 것이 더 좋은 대안일까 고르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선택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택권 앞에서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실존주의 학파(러셀 등)에 따르면

‘우리는 선택권이 없으면 분노한다,

반대로 선택권이 주어지면 두려워한다.’라고 말한다.


분노할 정도로 선택권이 없는 것을 참을 수 없지만

막상 선택권이 주어지면 두려워 선택권 앞에서 망설인다.

왜 그럴까?


A당과 B당 중에서 어느 한 당을 선택할 수 없게 강제로 막는다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나온다.


또 선택권이 주어지면

A를 선택하면 더 나은 B를 버릴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선택을 못 하고 근심으로 망설인다.


특히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서 선택하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한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선택권을 행사해야 불안이 줄어드는데

막상 현실에서 선택권을 행사하기에는 근거가 불확실하다.


현실에서는 선택하도록 올바른 방향을 이끌어 줄 이정표도 없고

또 지도도 없어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역(19-3)을 보자.


이 효의 주인공 여성은 서른 살이 넘도록 책임자도 못 되었다.

그렇다고 창피하다고 이웃 세상으로 가려해도

그곳은 여성이 중심이 된 문화이다.


패배를 겪은 여성의 처지로서는

패배자란 꼬리표가 따라붙어 틀림없이 왕따 생활을 겪을 것이다.

선뜻 이웃 세상으로 가기가 겁난다.


또 한편 생각하니 비록 패배로 인해 자존심은 상하지만

여성이 귀한 이곳에서 눌러앉아 미모를 뽐내며

공주처럼 사는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여성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치밀어 오는

자기 발전 욕구 때문에 괴롭다.

‘패배했다는 수치심을 끌어안고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책임자가 못 되었으면 그에 버금가는 자리를 찾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물음만

자꾸만 떠올라 괴롭고 불안하고 또 우울하다.


그때 이런 상황을 하소연하는 여성에게

주역은 이렇게 말한다.


“달콤한 맛을 본 후에 자세히 내려다보면 이로울 점이 없군요.

근심하는 것이 끝났으면 허물이 없군요.

[감림(甘臨) 무유리(无有利) 기우지(旣憂之) 무구(无咎)]”


한 마디로 주역은 그 여성에게

근심으로 고민만 하지 말고 선택권을 행사하라는 얘기이다.

어떤 선택을?


주역은 그 여성에게

이로운 점이 없어 이웃 세상에 가지도 못할 처지이거늘

삶에 필요한 에너지만 축내면서 근심에 매여 있지 말고

이미 근심하는 것은 끝났으니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때 선택했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으며

공동체에서도 받아줄 것이 확실하니

용기를 내어 선택하라고 한다.


그 여성은 선택 앞에서 왜 그렇게 망설일까?

바로 선택(임, 臨)에 따른 근심(우, 憂)이다.

그 여성은 선택하지 못하고 근심만 붙잡고

온통 속을 태우며 우울해하고 또 애태우고 두려워한다.


왜? 그 여성은 서른 살이 넘도록 책임자 자리에 도전했다가 실패하여

수치심으로 갈피를 못 잡고 헤맨다.

그래서 선택 앞에서 어느 길이 나을까, 속 태우고 두려워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주역은 그러지 말고

충분히 고민했으면 이제 망설이지 말고 선택하라고 한다.

즉 이미 근심하는 것은 끝났으니(기우지, 旣憂之)

선택해도 남들의 비난은 없다고 용기를 준다.


근심은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축내는 기생충과 같다.

그러니 근심은 빨리 끝날수록 좋다.

러셀이 말하듯 선택권이 주어지면 두려워한다.

두려움이 근심이다.


만약 그 여성이 선택(임, 臨)할 때

근심(우, 憂)으로부터 해방될 방법이 있다면?

그런 묘수의 대안이 있을까?

있다.


우리는 ‘선택하는 데 따르는 근심’이라고

선택할 때 당연히 따라붙는 껌딱지처럼

근심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만약 근심을 후 순위가 아닌 선 순위로 취급하면?

즉 ‘근심을 없애기 위한 선택’으로 순서를 바꾼다면?

더 세게 ‘오로지 근심을 없애기 위한 선택’으로

근심을 선 순위로 놓는다면?


아마도 많은 양의 선택이 마음의 건강을 위한

질 높은 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코인 투자 건으로 정치판이 어수선하다.

코인 투자도 선택권의 행사이다.

뒤늦게 선택권에 껌딱지처럼 근심이 붙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근심의 바다 위에서 헤맨다.


‘근심을 없애기 위한 선택’이 왜 중요한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가슴으로 느꼈을 것이다.

기우지(旣憂之)이다.

즉 이미 근심하는 것은 끝났다.


맨날 후 순위로 밀린 근심에 매달려서

아까운 생의 에너지를 축내지 말고

지금이라도 근심을 선 순위에 놓고 선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keyword
이전 16화가려 뽑은(비, 比) 행위는 선택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