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파노 Nov 18. 2023

움트는 마른 버드나무
(고양(枯楊) 생제(生稊))

주역에 나오는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 15

주역에는 흔히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는 

사물을 예로써 든다.

 

여기 나오는 버드나무도 그렇고 

태양, 달, 여우, 돌, 띠 풀 등 그 예는 아주 많다.

     

왜 그렇게 했을까?

주역은 서민의 애환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역 책을 쓴 사람들은 

물론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들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주역에 나오는 예를 이해하여 

실생활에 도움이 되게끔 적용하는 사람은

서민들이다.     


그러므로 서민들을 위한 책이기에 

주역은 쉬울 수밖에 없다.      

쉽다는 것은 

그 글월을 보고 해석(interpretation)할 때 

서민들이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말과 글의 해석에 

국한된 다음의 특성이 

주역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즉 ① 내용이 단순하며(simple)

② 돌려서 말하지 않고 내용을 

솔직하게 표현하며(straightforward)

③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로 

쉽게 쓰여 있어야(ordinary language) 한다.      


과연 그러한가?     

내가 보기엔 주역은 단순, 솔직, 평어로 

되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어렵다고 하나?

은유의 해석에서 막히기 때문이다.

(주역을 유교주의자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어렵게 왜곡한 것도 그 이유가 되지만.)


은유는 예컨대 

‘나는 천 길 구렁텅이에 빠졌어.’라고 

종종 우리는 말하곤 한다.     


이 말은 풀어쓰면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처럼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빠졌기 때문에 아주 힘들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고뇌를 

대화할 때 과장되게 표현한다. 

‘힘들어 죽겠어, 

그런 나의 힘든 내면을 알아주었으면.’이라는 

바람(want)이 그 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real 하게 표시하기 위해 

~처럼, ~같이 등의 비유 표시임을 생략하고 

내가 실제로 구렁텅이에 빠진 것처럼 

힘든 사실을 real 하게 말한다.      


주역도 그런 사람들의 속성을 반영하여

은유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보다도 주역은 서민들에게 

‘고민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 대한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면의 방법을 쓰기 때문이다.     


직면의 방법은 

가슴 아프게 하거나 감동을 주어 

‘그렇게 해야겠구나!’를 다짐하게 한다.


그때 듣는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평상시 언어로

주변에서 늘 보던 사물을 예로써 들어 

단순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풀어내야 한다.     


주역을 보자.      


구이 씨마른 버드나무에 움을 트는군요.

늙은 남자가 젊은 여성을 부인으로 얻으면 

이롭지 않음이 없군요.

[구이(九二고양(枯楊생제(生稊

노부득기여처(老夫得其女妻무불리(无不利)]”     


흔히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는 버드나무는 

땅에 물기운만 있으면 잘 번식한다. 


물을 정수하는 효과도 있어 

우물 곁에 버드나무를 심는다.      


버드나무를 꺾꽂이하면 

아무렇게 잘라서 심어도 

거의 새 움이 난다.      


대과 나라에 구이 청년은 

약관의 나이에 급제한 

소위 잘 나아가는 청년 책임자이다.     


그러나 파릇파릇한 청년 구이는 

겸손 문화가 짙게 감싸 

위에서 하라는 것만 마지못해 하는 

적극성과 주체성을 놓치며 살고 있다.      


이웃한 상층부 사람들도 

그저 하루하루 기뻐 날뛰기만 하지 

멀리 보고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주역은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구이 청년에게 위 지문처럼 

버드나무를 예로써 들어 직면시킨다.      


주역은 젊은 책임자 구이 씨에게 

‘시들시들 마른 버드나무 가지도 

기운차게 새 움을 틔우는 것을 

보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주역은 자발적으로 기운을 내지 않고  

마지못해 겨우 일을 하는  

청년에게 책임자 역할이 무색하다고 

얼굴을 뜨겁게 한다.      


또 주역은  

늙은 사람도 생기를 얻기 위해 

젊은 여성을 처로 얻어 

밝게 살려고 몸부림치는데

새파란 청년이야, 

결코 늦었다고 할 수 없으니

이제라도 기운을 차려 

힘차게 나아가라고 이른다.      


버드나무는 여리다. 

여기 나오는 청년처럼.     

그러나 버드나무의 다 죽은 가지도 

다시 살아나 움을 틔우듯

생명력은 질기다.      


젊은 청년도 

그런 질긴 생명력이 있으니 

끈질기게 도전하면서 나아가라고 한다.     


직면(confrontation)은 듣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해서 

깨우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변화를 원치 않거나

변화의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을 때는 

직면시켜도 가슴 아픈 것을 참고 지내려 한다.      


그럴 때 단순한 직면을 넘어 

도전하는 마음을 심어 줄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건(Egan)이라는 심리학자는 

직면시킬 때보다 

효율적인 삶을 산다는 확신이 있다면 

도전을 택할 것이다라고 한다.     


위 지문에서 

마른 버드나무에 움이 튼다는 사실만 

얘기해도 된다.      


그러나 직면을 넘어 도전시키려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성을 취하는 것이 

늘그막에 이른 남성에게 

정말로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강조의 표현은 ‘무불리(无不利)’

즉 ‘이롭지 않음이 없다.’라고 

이중의 부정을 쓰고 있다. 

이중의 부정은 아주 강력한 긍정이다.     


효율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강조형을 쓰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큰 열매는 먹히지 않는다 (석과불식, 碩果不食)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