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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노 Jun 15. 2024

참고 견디면 왜 수치심만
더 커질까?

-짧지만 생각나게 하는 도(道)


마디 1      


겨울은 구조 조정기처럼 고통스럽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각박한 살림살이를 더 바짝 죄어야 한다.     


그러나 참아내고 견디어 내다보면 

미구에 따스한 봄날이 오듯  

사는 것, 먹는 것 등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어지는 시기가 온다.     


그러므로 주역에서는 

차가운 겨울을 정(貞)이라 하며 

그 시기는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또 고생스럽지만 기다림의 보상이 있어 

희망을 노래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주역 32-3은 

참고 견디는 시기(정, 貞)를 겪어도

희망은커녕 왜 인색한 삶이 될까?      


구삼 씨남에게 베푸는 그 덕성을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 행하지 않으면

혹여 수치스러움으로 이어질 것이네요.

참고 견디는 것이 외려 인색하게 되네요.

[구삼(九三불항기덕(不恒其德

혹승지수(或承之羞(()]”     


글귀 끝에 나오는 정(貞) 인(吝)은 

‘참고 견디면 인색하다’라는 뜻이다.      


주역 32-3 서사에 보면 

후배에게 책임자 자리를 빼앗긴 

청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청년은 후배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로 

수치심에 어쩔 줄 모른다. 

게다가 그 청년이 속한 사회 분위기는 

겸손의 문화가 짙게 흐른다.      


패배는 겸손 문화에서 자랑스러운 일이 못 되니 

그 청년은 남들의 볼 낯이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그러다 보니 청년은 

‘내가 못나서 그런 거야!’ 하며 

화살을 자꾸 자기의 내면세계로 쏜다.     


마디 2     


마디 1에 소개된 주역 지문을 보면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란 항(恒)을

덕(德)성 앞에 수식어로 붙여 놓았다.     


덕(德)은 친절 등 남에게 베풀어주는 행위로 

참으로 선량한 품행이지만 

어쩌다 한 번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항, 恒)’ 

지켜내기란 매우 어렵다.     


그 청년은 패배 의식에 어쩔 줄 모르는데 

여기에 덕성(德性) 즉 

친절 등 베푸는 행위를 지키라니 

벅차고 벅차기만 하다. 


게다가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항. 恒)’ 

지키라 하니 

도저히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견디어 내기 어렵다.     


자연히 청년의 마음은  

‘수치심을 없애려면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 남에게 베풀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해’라고 

수치심을 더욱 키우는 방향으로 

자신을 향해 맨날 다그친다.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리니 

목표를 이루겠다고 참고 견디면 

어떻게 될까?     


틀림없이 ‘나는 반드시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 지켜야 하는데?

어쩌나! 오늘도 내 마음만 소중하여 

인색한 사람이 되었으니?’라고 한탄만 한다. 

이런 경우 자기 비하에 찌들어 

수치심은 더욱 커져만 갈 것이다.     


심리학자 엘리스(Ellis)에 의하면 

수치심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스스로 합리적이지 못한 신념 즉 

‘비합리적 신념’을 키워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스스로 피한다.     


엘리스에 의하면 

수치심을 앓고 있는 사람의 

비합리적 신념은 이렇다.      


① 나는 반드시 훌륭하게 일을 수행해 

중요한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한다. 

② 나는 사려 깊고 공정하며 친절해야만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을 수 있다. 

③ 사람들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면 

나는 나쁜 사람이며 비난도 받고 벌도 받아야 한다.      


심리학자 엘리스의 말처럼 주역의 그 청년은 

수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나서서 친절을 베푸는 등 

덕(德)을 꼭 지켜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또 이러한 덕성을 늘 변하지 않고 베풀어야 한다며  

매일매일 스스로 다그쳐 

굳은 신념으로 키워가고 있다.     


이런 합리적이지 못한 신념에 빠져들 때 

‘그것도 하나 못 지키나?’하고 

청년은 스스로 자기 비하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마디 3     


윗글에서 주역이 말하는 ‘더 나은 삶의 길’ 

즉 도(道)는 어디에 있을까?     


주역은 수치심을 벗어나려고 

덕(德)과 항(恒)의 가치에 매달리다 보면 

합리적이지 못한 신념을 키우니, 

외려 더욱 수치심은 커져만 갈 것이다.      


결국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갈수록 주저주저하는 행태로 변하게 되므로 

그러지 말라고 이른다.      


더 나은 삶의 길 즉 도(道)는 

항(恒)과 덕(德)을 곧이곧대로 지키겠다고 

자신을 옭아매는 그릇된 신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기어이, 꼭,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하듯이’ 등 

우리의 가슴을 바위처럼 딱딱하게 만드는 

지키기 어려운 말들이 만든 굴레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배경 서사에서 언급한 

후배 때문에 얻은 수치심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흘러가는 시간이 해결하라고 맡겨 두어야 한다.

시간이 가면 수치심은 옅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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