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 1
부모 1 : ‘네가 벽에 낙서하고 싶었구나~.’
(얘는 여기다 낙서를 하면 안 되는데,
그렇지만 공감 교육을 해야지.)
부모 2 : ‘낙서는 종이에만 하는 거야~’
(낙서를 아무 데나 한 것은 분명 잘못한 거야,
낙서한 그때 잘못된 것을 바로 교정하게 해야지.)
❋ 어린아이가 보는 세상은 미숙하므로,
이때는 교정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디 2
공감이란 말이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그만큼 실생활에서 공감이 중요하다는 점도 읽을 수 있다.
반대로 공감이 부족했다는 점도,
또 아직도 우리 사회에 공감이 더 필요한 것도 반증한다.
책에서 보면 공감(Empathy)은 너처럼(as you) 느껴야 하며
너를 향하여(toward you)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명쾌한 것 같지만 그 말이 그 말 같다.
생각건대,
공감 대화는 ‘나’를 위한 대화가 아니고
‘너’를 위한 대화일 것이다.
‘너’를 올곧이 위하려면
‘나’의 감정, 또 ‘나’의 생각이 끼어들어 갈 자리가 별로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자연히 듣는 데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너’의 세상은 ‘너’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가장 잘 보이고
또 ‘너’ 나름대로 옳게 보는 것이다.
‘너’의 세상을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은
‘나’의 어설픈 잣대로 내 나름대로 가늠하고
내 편견으로 ‘너’를 평가하기 쉽다.
‘너’의 세상은 ‘너’ 나름대로는 최선이고
‘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옳고 타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통념상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너’와 ‘나’의 대화만큼은 그렇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대화해야 한다. 인정은 하든지 말든지 자유이겠지만.)
실생활에서 공감 대화가 많이 이루어져야 함은
‘너’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솔직히,
‘나’의 세상을 설명하려 하고, 고집하려 하고,
옳다고 주장하려 하기 때문은 아닐지?
그저 ‘나’는 ‘너’의 말을 들어주면 그것 자체로 족할 것이다.
만약 ‘나’의 말이 꼭 나오려 한다면
억지로 입틀막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나’의 말이 불쑥불쑥 나오려 한다면,
’ 그렇구나 ‘ , ’그래서?‘, ’ 정말!‘, ’많이 속상하지 ‘ 등
그런 말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나‘의 감정, ’나‘의 생각을 쑥 빼고
올곧이 ’ 너‘만을 위해서 대화를 한다면,
’ 너‘는 오히려, ’나‘의 사람처럼 착 달라붙지 않을까?
마치 껌딱지 마냥.
이것이 싫어서 데면데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감 대화했다고 빙자하는 것은 아닐지?
(내가 너무 나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