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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09. 2019

우리, 잘 살고 있는 걸까?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

아, 배불러.


가만 돌이켜보면 하루 중 배고팠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주위엔 먹을 것이 넘쳐나고,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면 휴대폰으로 먹고 싶은 것들을 언제든 배달시킬 수도 있으니까. 하루 종일 배는 부풀어 올라 있고, 배부르다는 말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먹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어쩔 땐 무언가를 먹으면서, 또 먹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잖아. 


배고픔을 해결한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아빠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도 어떻게 보면 '먹고살기 위한 일'이거든. 열심히 일한 아빠의 노동은 월급으로 치환돼. 그리고 그 월급으로 우리 가족은 먹고사는 거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음이 힘들고 몸이 고돼도 매일매일을 출근하는 이유!)


마음을 공부하는 심리학에서도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는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하위 단계의 욕구 충족이 상위 계층 욕구의 발현을 위한 조건이라고 했어. 그 첫 단계가 바로 '생리적 욕구'야. 그 뒤로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자리하고 있지만 1차적인 생리적 욕구 중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봐. 먹지 못해 걸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자아실현으로 가는 과정을 모두 성취해낼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살아라!"


예전엔 둘이 싸우다 화가 가라앉지 않으면 상대방의 뒷머리에 대고 욕을 했어.


"자~알 먹고, 자~알 살아라!"


참 재밌지?

정말 잘 먹고 잘살란 말은 아니야. 저 혼자 잘났다는 상대방을 향해 비꼬으면서 하는 말이거든. 그런데 재밌는 건, 요즘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정말로 상대방이 잘 먹고 잘 살까 봐 그러나 봐. 여기엔 다음과 같은 의미도 숨어 있기도 해. 


잘 먹는다 = 잘 산다


잘 먹는다고 다 잘 사는 건 아닐 거야.

하지만, 잘 살기 위해서는 '잘 먹는 것'이 필수일 수도 있어.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잘 살 가능성이 높지. 


그런데 말이야.

아빠는 웬만하면 항상 배가 부른 상태지만, 정말로 내가 잘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때론, 마음이 무척 공허하기도 해.


잘 산다는 건 뭘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의 축에 속해.

1인당 국민 소득은 3만 불이 넘지. 1만 불은 1994년에, 2만 불은 2010년에 넘었어. 세계 189개국 중 28번째로 잘 살아. (2018년 기준, 출처: IMF/ 전체 GDP 기준은 12위) 국민 소득 1만 불을 넘어 3만 불이 되기까지의 속도는 눈부시게 빨랐지. 아빠가 어렸을 땐 집 안에 화장실 있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집 안에 화장실이 없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 갑자기 화장실 이야기는 왜 하나 싶겠지만, 아빠는 가끔 이걸로 시대의 변화를 느껴. 먹는 건 남아돌 정도로 풍족하고, 매년 우리나라 인구 (약 5천2백만 명)의 3분의 2가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걸 보면 정말 '잘 살고 있구나'란 말이 절로 나와.


그런데, 잘 먹고, 좋은 곳에 가는 것.

그게 다일까? 비싸고 유명한 식당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해보지 못한 경험을 위해 해외여행을 가는 것. 그것만으론 뭔가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그렇게 했다고 아빠가 할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잘 사는 게 뭘까?'를 자꾸 고민하게 돼. 더불어 '잘 살고 있는 걸까?'도.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 Mill, J.S -


많이 들어본 말이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단,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란 말의 원문이야. 요즘은 배가 불러서(?)인지 이 말이 자꾸만 생각나더라고. '존 스튜어트 밀'은 '질적 공리주의자'로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한 시점에 이러한 말을 했어. 배고픔이 급속도로 해결되었던 시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물질적인 발전과 함께 시작된 고민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


재밌는 건 '양적 공리주의자'도 있었단 거야.

'벤담'이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행복이란 쾌락이고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했어. '양적 공리주의자'답게 벤담은 모든 쾌락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고, 쾌락과 고통의 양을 측정하는 계산법까지 제시했지. '밀' 또한 삶의 목적은 '행복'이란 것에 두었어. 다만, 행복을 위한 쾌락의 '양'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이를 바탕으로 나온 말이 바로 위에 있는 '배부른 돼지와 소크라테스'야.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


배고플 때 맛있는 걸 먹는다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겠지? 

하지만 배가 부르면 이내 기분이 좋진 않을 거야. 더불어, 배가 부르다고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힘들고. '밀'이 이야기한 것처럼, 고상한 쾌락을 위해 책을 읽거나 자기 계발을 하면 어떨까? 자아실현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는 기회가 될 테지만, 우리는 공부할수록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아갈수록 생각과 고민은 더 많아지게 돼. 


어쩌면, '잘 사는 것'에 대한 답은 없는지 몰라.

여느 문제집 뒤에 있는 답안지와 같은 '정답'이 있으면 좋겠지만.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좋아하는 만화책을 읽는 것. 그토록 찾던 깨달음을 어느 책의 한 글귀에서 마주하는 것.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자주 반복되는 것. 즉, 행복을 좀 더 자주 느끼는 게 '잘 사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다만, 이것 또한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반드시) 연관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100% 맞는 답인가 싶기도 해. 배고픔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하고, 추운 겨울 따뜻한 방바닥이 있는 집이 있어야 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다는 조건이니까.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참 많아. 그렇지?


그러니, 우리는 고민해야 해.

'잘 사는 것'에 대해. '잘 사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잘 살 것인지'. 그것들을 이루기 위한 나의 기준은 무엇인지. 최소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후일, 나의 자녀들에게 '잘 산다는 것'에 대해 무어라고 말해줄 것인지. 그래서 아빠도 고민 중이야. 정답은 아니어도, 그것에 가까운 건 무엇인지. 무엇을 너희에게 알려줘야 할지를. 한 번, 같이 고민해보지 않을래?




p.s


참고로, 혜월 스님께선, '어떻게 잘 살아야 합니까'란 물음에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어.


"남 괴롭히지 말어."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간에.

남을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라 말씀하신 거야.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도 깊어지는 말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 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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