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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23. 2019

슬럼프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직장인의 지병. 그러니 친근하게 함께 가야 할 무엇.

슬럼프의 인사는 다음을 기약한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온다.

그 말은, 그렇게 슬럼프는 오지만 또다시 떠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인사는 'Good Bye'가 아니다. 썩 유쾌하진 않지만 슬럼프가 던지는 인사말은 'See you again'이다. 슬럼프는 가지만, 또다시 오고야 만다. 인생이란 원래 굴곡진 원형이다. 오르막과 내리막 없이 평탄하기만 하면 좋겠지만, 누군지 모를 절대자는 그렇게 우리가 편안하게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보는 모양이다.


슬럼프는 높낮이의 개념이긴 하나, 어쩐지 슬럼프를 만났을 땐 터널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두움과 기약 없음.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건 꽤 큰 절망이다. 끝이 어디인지라도 알면 견딜 수 있는 끈기가 생기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은 영원과 같다. 그럼에도 한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은 가히 애처롭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터널은 지름길이다. 

터널은 막힌 무언가를 뚫어 놓은 직선의 길인 것이다. 어두운 그 길고 긴 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발견한 희미한 빛으로 헐레벌떡 달려가면 마침내 출구가 보인다. 그리고 눈부심에 잠시 눈을 가리고 나간 그곳은 나의 목적지와 가까워 있을 가능성이 높다. 터널은 어찌 되었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만나는 일직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의 지병(持病)


나는 슬럼프가 직장인의 지병(持病)이라 생각한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그 증상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3년 주기로 온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3개월, 어떤 이는 3일마다 온다고도 하는데 3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슬럼프는 그렇게 우리네에게 친근(?)하다는 생각이 고스란하다.


사람은 병을 만나게 되면 화들짝 놀란다.

처음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그것을 떨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좋다는 민간요법부터,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가는데 쉽게 떨어질 것 같았으면 오지도 않는 게 병일지 모른다. 그렇게 그 증상이 자주 나타나거나, 아예 평생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 단계가 되면 사람들은 그 병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병은 '지병'이라는 조금은 더 친근한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슬럼프가 그렇다. 

어렸을 땐 슬럼프가 오면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고, 그것에서 탈출하고자 안간힘을 썼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늪에 빠지는 것과 같이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빨려 들어갔음을 상기한다. 그러한 순간이 반복되고 나면, 어느샌가 슬럼프는 '지병'이란 생각을 하게 되고, 슬럼프가 왔을 땐 '어? 왔구나..."란 인사를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함께 가야 할, 삶의 어디선가 분명 만나게 될 것이라는 지혜로운 체념이 생긴 것이다.


유병장수의 시대


옛날엔 60세까지만 살아도 오래 살았다는 문화가 있었다.

그래서 환갑잔치를 하곤 했었는데, 60세까지 살아 있으려면 '무병'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인생 2막'이란 말과 함께 100세 시대가 된 것이다. 해서 다시 생긴 말이 '유병장수'의 시대다. 수명은 연장되었으나, 노쇄해가는 인간의 육체는 망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직장인은 좀 더 분주해지고 고민도 깊어졌다.

직장생활엔 정년이 있다. 그리고 정년이 지나고 나면, 이제껏 일해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만큼 슬럼프와 함께할 시간은 더 늘어난 것이다. 앞서 슬럼프가 '지병'이라 했는데, 우리는 망가지는 몸에 생기는 실제 '지병'뿐만 아니라 슬럼프라는 '지병'도 안고 가야 한다. 지금 내게 찾아오는 슬럼프를 마냥 떼어버리고 싶기보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세히 보고 싶은 이유다. 안고 가야 할 것이라면, 또다시 만나야 할 것이라면 어떻게 같이 가야 할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슬럼프는 결국,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란 걸 다시금 깨닫는다.




강의가 있어 얼마 전에 다른 도시를 다녀왔다.

이번엔 기차를 타지 않고, 직접 운전을 해 다녀왔는데 무수한 터널들을 지나간 기억이 있다. 물론, 도로에서 만나는 터널은 그리 길지 않다. 어느 정도의 길이인지는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알 수도 있고,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이내 출구는 나오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터널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터널이 없었다면 산을 둘러 돌아가야 할 길이었을 텐데, 그것을 뚫고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면서. 요즘은 터널이 아주 잘 되어 있어서, 졸지 말라고 번쩍번쩍 빛을 발하기도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슬럼프가 터널의 모습을 하고 왔을 땐, 그 빛을 보고 소리를 들어보려 한다. 나에게 주는 신호가 분명 있을 거란 기대다.


함께 해야 하는 존재라 생각하면, 그러한 기대라도 생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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