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 '내려오기 기술'의 핵심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뒷모습
삶은 마치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꾸역꾸역 올라가는 것 같아 보인다.
출근길이나 퇴근길, 한 방향을 보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그렇다. 다리를 들어 한 계단을 밟아 위로 가고 있는데, 그것이 제자리를 걷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의 뒷모습은 무표정이므로, 나는 그것에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내 뒷모습도 그러할 것이므로, 누군가는 나를 연민할 것이 뻔하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오르려 한다.
아기들도 무언가에 가로막히면 우선 오르고 본다. 그리고 그 아기가 자라 인생에 대해 배워가면, 사회는 오르고 오르는 곳이란 걸 강요받으며 어른이 된다. 왜 올라가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그러하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 세포를 휘감는다. 그래서 오르는 것은 '상승'을 의미하지만, 때로 그것은 '힘겨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 오르는지 깨닫지 못하거나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그것은,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남들에게 착하게 보이기 위해 사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힘겹게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내려갈 때의 즐거움
반대로, 내려간다는 것은 '하강'을 의미하여 사람들에게 그것은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려올 때의 즐거움은 모두가 안다. 본능적으로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도도 빠르다. 꾸역꾸역 오르는 것과, 가뿐하게 내려오는 것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내려온 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다시, 세상은 우리에게 오르고 또 올라야지 포기하고 내려가면 큰일 난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를 끝을 가리키며 거의 다 왔다는 압력이나 자기 최면으로 버티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
그러면서 우리는 잊고 만다.
내려오는 법을 알아야 쉴 수도 있고, 다시 오를 수 있음을.
내려오기를 받아들이는 기술
그렇게 위만 바라보다 살면, 내려오는 것이 즐겁지 않다.
분명 내려와야 쉴 수 있고, 집에 갈 수 있으며 다시 오를 수 있는데 잠시라도 뒷걸음질 친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맘 편하게 내려올 줄 알아야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갈망한다.
그것들의 맛을 보면, 당최 내려갈 엄두가 안 난다. 오르고 오르다 깃발을 잡아든 사람들은, 아래를 볼 겨를이 없다. 좀 더 올라가면 다른 깃발이 있을 거란 기대로 숨이 가쁘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저 오른다.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혼이 아파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떠한 순간에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려오기를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다. 자신이 취한 그 지위의 선상에 갇혀 있는 것. 더 올라갈 수 없을 때,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낮추고 내려다보려는 좋지 않은 습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군가와의 갈등에서 우리는 우위를 점하려 든다.
상대방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를 압도하려 하지만, 상대 또한 나보다 몸집을 키우거나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나를 찍어 누르려한다. 그럼 나 또한 어떠한 수단을 쓰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양상에서 남는 것은 서로의 상처뿐이다. 상대보다 더 높이 가려는 마음을 버리고, 때론 먼저 사과하거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화해를 청하면 의외로 상황도 호전되고 내 마음도 편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때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내려오기 기술'의 핵심이 아닐까.
물론, 목표를 가지고 오르는 것은 누군가에겐 맞는 일일 수 있다.
다만, 영원히 오를 수 없으므로 오르다 잠시 내려가야 할 때 불안해하거나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충분히 나를 괴롭히고 불안해하며 살아왔으니까.
내려가야 할 때를 알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좀 더 안전하다.
그때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려는 사람은 발목을 접질리거나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삶도 그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