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와 딴짓을 할 줄 아는 지혜
왜 이리 아등바등 살았을까?
가끔, 퇴임하신 분들을 사석에서 뵙는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와 자욱한 연기 속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면, 그분들은 역시나 왕년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 왕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존경하던 그분들이, 퇴임 후의 허무함과 의기소침함을 잊고 어린아이와 같이 신나 그 시절을 말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는다. 듣고 또 들은 이야기 일지라도, 다가오는 의미는 매번 새롭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신나게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끝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 그때를 생각하면 왜 그리 아등바등 살았는지 몰라! 지금 돌아보면 일이 전부가 아니었는데..."
누구보다 강성이었고, 열정이 오히려 지나쳐 후배들을 힘들게 했던 그분들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난 그분들에게 당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목이 타들어 간다. 물 잔을 들어 불타는 목에 물을 끼얹어 그 상황을 모면하고는, 그럼에도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당황스럽지만 어쩐지 이해가 되어서. 일 밖에 모르던 그분들의 탄식이, 현직에 있는 나에게 많은 울림을 주는 순간이다.
멀리 볼 줄 아는 여유
잠시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일'을 가진 누구나 '불안'을 가지고 있다.
직장인도 그렇고, 육아를 하는 부모나 공부를 하는 학생도 그렇다. '직업'이든 '일'이든 '공부'건 간에. 무언가가 잘못될까 봐 모두는 아등바등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오랜 시간 어느 분야에서 탑을 쌓은 사람들은 그것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한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봐 매일이 두렵고 불안하다.
그런데 그렇게 아등바등하다 보면 확실히 시야가 좁아짐을 느낀다.
말 그대로 '근시안'이 되는 것이다. 지금 눈 앞에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항상 100점 맞던 학생이 80점을 맞고, 만날 인정받던 직장인이 한 번 대차게 상사에게 깨졌다고 해서 하늘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근시안은 언제나 항상 절망과 슬픔을 조명한다. 그것에 더 집중한다. 좀 더 멀리 보면,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가려 신발끈을 여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유럽에서 주재원을 할 때였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고, 꼬인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던 일을 마음 한 가득 담고는 너무나 답답해 사무실 근처를 맴돌았던 적이 있다. 눈을 조금 들어 보니 하늘이 있었다. 주위를 보니 꽃이 있었다. 물이 있었고 바람도 불었다. 근시안을 벗어나니 많은 것들이 보였다. 그리곤 무언가 알 수 없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푸념만 한다고 뭐가 좋아질까. 내가 가지지 않은 건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그것이었다. 여유가 생기니 용기가 생겼고, 그 용기는 무겁게 들고 있던 근심을 그저 놓아버리게 했다.
아, 그런데도 큰일이 생기지 않는구나.
딴짓을 할 줄 아는 지혜
너무나 바빴던 주재원의 신분이었기에, 잠시 일을 뒤로하고 산책을 하는 것은 사치라 생각했었다.
마음의 여유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딴짓'은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딴짓'은 결국 더 나은 마음과 해결책을 가져다준 것이다.
스리니 필레이의 [멍 때리기의 기적]이란 책이 있다.
제목만 보면 가벼워 보이지만, 최신 연구 결과를 총망라해 '비집중력 과정'이 얼마나 능동적인 마음의 기제인지를 역설한다. '딴짓' 즉, 비집중은 뇌를 준비하고 충전하고 조정해서 필요할 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머리를 휴식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딴짓을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하지만 '딴짓'은 '돌아옴'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무거운 마음에 잠시 밖에 나가 산책을 하던 내가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건 딴짓이 아니라 '일탈'이다. 무언가 생산적이고, 나를 성장시키는 지혜로운 딴 짓은 본업으로 돌아올 때 빛을 발한다.
일 밖에 모르던 그 선배들은 퇴임을 하고 나서야 '일'과 '일상'에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때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왕년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 의미를 끄집어내어 깨닫는다. 그분들이 하지 못한 걸 나는 해보고자 한다.
근시안을 벗어나 멀리 보려는 노력.
힘겹고 무겁게 들고 있는 근심과 걱정을 잠시 내려놓는 연습. 딴짓을 할 줄 아는 지혜.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과 '일상'에 거리를 두고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 것.
어차피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나를 지키며, 이유라도 알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