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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10. 2019

왜 나는 이 시간을 견뎌내고 싶은가

세상이 나에게 던지는 벽돌로 든든한 기초를 쌓으면서

세상이 덤빌 때가 있다


뜻하지 않고 원하지 않은 것들이 마구 몰려오는 순간이다. 

되는 일도 하나 없을 때. 몰려오는 그것들에게 나의 안위와 의도, 선의는 온데간데없다. 그저 저들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내뱉는 말과 표현 그리고 못된 결과들은 나를 마구 짓밟는다. 그 짓밟힘 속에서 나는 고뇌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나에게 왜 이러는가. 고로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러한 순간에서 우리는 견뎌내야겠다 스스로에게 외쳐야 한다.

단, 그저 허공에 뿌리는 다짐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선 견뎌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견딘다는 건 그저 웅크리고 나를 짓밟는 세상에게 몰매를 맞는 게 아니다. 그래 봤자 견디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세상이 덤비는 그 상황을 우리는 '인지'하고 '판단'해야 한다.


긍정적인 마음과 냉철한 이성


상처가 생겼을 땐 우선 그것을 응급처치해야 한다.

세상의 공격에 생채기 난 마음과 멘탈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스려야 한다. '충분히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다 좋아질 것이다', '이건 과정이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위안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꽤 훌륭한 응급처치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는 모든 문제들이 자신을 비껴가기만 바라는 유아적인 사상이다.


응급처치가 끝났다면 '냉철한 이성'을 떠올려야 할 차례다.

믿도 끝도 없이 '그래, 세상아 덤벼라'하는 오기나 '내가 그렇지 뭐, 무얼 할 수 있겠어'란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전에 말이다. 

잠시 시선을 바꾸어 나를 바라보는 CCTV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메타인지적 지식'이 필요한 순간. '메타인지적 지식'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실행할 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나는 왜 이 시간을 견뎌내고 싶은가!


인지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데 설명할 수는 없는 지식', 다른 하나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설명할 수도 있는 지식'이다.

두 번째 지식만이 실제 지식이며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다!


나는 왜 이 시간을 견뎌내고 싶은가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에게 물을 때 나올 수 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느낌만으로 끝나는 지식이 아니라, 또 다른 남인 '나'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황은 '지식'이 되고, 그것을 우리는 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노트에 적는다. 심리학에선 이를 '감정의 인지화'라고 한다. 마음속에 있으면 뭉뚱그려질 그것들을, 노트에 '분노', '부끄러움', '당황' 등의 단어로 적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구나', '이런 감정을 느낄 때 난 이렇게 반응하는구나'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한 상황이나 인물 관계도를 그려본다.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부터,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들. 내 인생이라는 영화의 감독이 되어 시나리오를 써보듯이 말이다. 그러면 상황이 짐작되고, 내가 개선해야 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을 알 수 있게 된다. 보통은 '나'를 따로 떼어 놓고 세상이, 사람들이 잘못된 거라 부르짖기 십상이지만 '나'를 떼어 놓고는 아무런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주인공 없는 영화와 같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 나는 왜 이 시간을 견디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적는다. '살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두렵지만 용기를 내고 싶어서', '억울해서' 등. 우리는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다. 위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낼 용기가 없다.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써 내려가는 건 그보다 쉽다. 그리고 그것을 두 눈으로 보며 한걸음 떨어져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객관화의 가장 좋은 점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다른 이의 걱정거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덤빌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나는 이 시간을 견뎌내고 싶은가.' 

자주 당하고, 자주 묻다 보면 스스로의 오답노트가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잘 다듬다 보면 정답 노트가 만들어질지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치고 회복하고 쓰러지고 또 일어날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던지는 벽돌로 든든한 기초를 쌓으면서.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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