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게 활력을 부여할 때, 우리의 인간성은 오히려 회복되지 않을까
숨 쉬는 존재의 고결함
그리고 그 아이러니
숨 쉬는 존재는 고결하다.
하지만 더불어, 숨 쉬는 존재는 고결함을 오염시키고 저버린다. 숨 쉬는 존재의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숨 쉬는 존재는 '제 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숨'을 위협하거나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숨을 쉬어 고결하지만, 그 숨의 고결함은 어디까지나 '제 숨'에 한정된다. 생명체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걸 알지만, 목숨을 '경시'하는 풍조는 이미 만연하다. 그리고 그 만연함이, '제 숨'에 한정되어 고결함을 잃어가는 우리 모습을 증명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서글프다.
생명이 경시되는 풍조도 그렇고, 나 또한 내 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숨을 경시해야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 그 고결함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것을 저버릴 수 있는 내재된 에너지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나는 서글프고 불안한 것이다.
숨을 빼앗는 가장 쉬운 방법
'대상화(對象化)'
사실, 우리는 소스라치도록 어느 것의 숨을 빼앗는데 익숙해져 있다.
상대를 숨 쉬는 존재로 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죄책감을 덜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 방법은 바로 '대상화'다. 대상화는 어떤 것을 변형하여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갑질 문화가 그렇다.
무언가 내가 상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을이라는 사람들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필하거나, 얼마간의 돈으로 맺어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 유명한 노룩패스를 생각해보자.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굴려버리는 그 장면에서 나는 그 어떤 '숨'도 느낄 수가 없다.
물론, '대상화' 나름의 역할도 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또는 군대나 이와 같은 집단에서는 각자의 '직급'으로 대상화를 하며, 이 때문에 일이 되고 공동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공동의 이익이라는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 개개인의 사정을 다 봐준다면 일은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대상화의 태생적인 한계는 결국 '숨'을 빼앗고 구조조정 대상이나 부품으로 사람을 격하시키는데 앞장선다. 대상화도 문제고, 개개인의 사정을 다 봐주는 것도 문제이니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 서로 간의, 본연의 상처가 여기에서 비롯됨은 물론이고.
역대상화를 통한 '숨'찾기
그렇다면, 숨 쉬지 않는 것은 고결하지 않는가?
숨 쉬지 않는 것을 우리는 '사물'이라 하는데, 나는 사물이 살아 숨 쉬는 것들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사물이 숨이 없다는 이유로 고마움을 덜 느낀다. 으레 그렇게 설계되었으니, 제 소임을 마땅히 해야 한다고 강렬하게 믿는다. 예를 들어, 랩톱이 오류가 걸려 멈췄다면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은 미진한데, 사물이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는 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역대상화'를 해보려 한다.
사물에 숨을 불어넣는 것. 내가 받은 도움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는 것. 그 과정을 찾아가다 보면, 오히려 우리의 인간됨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대상화에 익숙해져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숨을 없애는 우리가, 숨이 없다고 믿는 것들에 숨을 부여하면 그 '숨'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지고 소중해지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물의 활력'이다.
사물에게 활력을 부여할 때, 우리의 인간성은 오히려 회복되지 않을까.
모든 것에 감사해하고, 고마워하는 우리 본연의 마음을 상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