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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27. 2020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때

분노하는 것은 내가 독을 마시고 남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때, 사람은 어떻게든 표현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분노를 '규제'하기 시작한다. 문명의 시작과 함께, 법과 규제 그리고 암묵적인 사회적 규약으로 분노를 다스려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 대신 '말(단어)'을 던진다. 물론, 규제를 깨고 원시적으로 폭력을 쓰거나 목숨을 해하는 일도 다반사다. 분노는 그렇게 서로에게 '말'을 던지거나 '돌'을 던지게 하는 원흉이다. 말은 마음의 상처가 되고, 돌은 육체의 상처가 된다. 무서운 건, 마음의 상처로 인해 돌을 드는 사람도 있고, 돌을 맞은 사람은 육체뿐 아니라 마음은 물론 영혼에도 멍이 든다는 것이다.


분노의 양산과
선택적 분노의 시대


그런데 작금의 시대를 보면 '분노'가 양산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경적 소리 하나에도 주먹이 오가고, 헤어지자는 문자나 층간 소음에도 살인이 일어난다. 또는, 남과 여, 왼쪽과 오른쪽, 구세대와 신세대를 나누어 대립시키는데 그 대립 사이에는 어김없이 '분노'가 존재한다. 분노의 벽은 대립하는 양쪽을 분명하게 긋는 기준이 되고, 그 두께는 온갖 '말'과 '돌'로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다.


'분노'는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공중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의 부대낌을 통해 덥석 그 분노 하나 또는 여럿을 제 것으로 만드는 모양새다. 말 그대로 '분노의 양산'과 '선택적 분노'의 시대. 요즘은 그것이 더 심해져 누구 하나라도 선을 살짝 넘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분노' 그 자체가 되는 것 같아 무서움을 느낀다. 마치, '분노'가 없으면 하루라도 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분노'는 대개 피해의식이나 자신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때 나온다.

자본주의 체제는 보이지 않는 경제적 계급을 만들어 사람들을 이리저리 나누는 대립의 주체가 되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마음보다는 물질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 시대의 허무함과 열등감, 그리고 어두운 내면들이 '분노'와 만나 더 큰 폭발을 한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칼 구스타프 융이 말한 '그림자' 개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림자'는 인간의 어둡고 사악한 측면을 나타내는 원흉이며, 이는 본능적이고 비합리적이며 투사적 경향이 강하다고 정의된다. 누군가에게서 나의 그림자와 같은 어두움을 보면, 더 쉽게 분노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내로남불'이 대표적인 예다. 내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드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실수지만, 남이 그러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경적을 눌러댄다.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때:
분노하며 원한을 품는 것은
내가 독을 마시고 남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사실, 분노는 억제할 수 없다.

자기 계발서에서 분노를 조절하라거나 억제하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머리로만 생각할 때 우리는 '그때 조금만 더 참을 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이 개입된 실제 상황에선 불가능한 이야기다.


다만, 우리는 분노를 알아차릴 순 있다.

아, 내가 이럴 땐 이렇게 분노하는구나. 이러한 감정이 드는구나. 화를 못 이겨 내가 무엇을 집어던졌구나. 그랬더니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구나 등. 분노는 대개 한 번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거나, 또 다른 분노가 더해지면서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터지곤 한다. 분노는 그렇게 압축에 압축이 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폭발력이 상당하다.


그래서, 우리는 엄한 곳에서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억제할 수 없다면 그것을 예방하거나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벌어졌던 '후회스러운 경험', 그때 '알아차린 깨달음'과 지금 '작동하는 이성'. 그것들을 두루 모아 현명하게 분노의 요소를 하나하나 순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를 알아차리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한 길이라는 것이다.

분노를 하면 사회적으로도 힘들지만, 생물학적으로도 나에겐 치명적이다. 분노의 호르몬인 노르아드레날린은 자연계에 있는 복어와 뱀의 독에 버금간다고 [생명의 신비 호르몬]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격렬하게 화를 내면 두통, 두근거림, 식은땀, 호흡곤란 등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작가이자 배우인 말라키 맥코트의 말을 떠올리며 분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곤 한다.


"분노하며 원한을 품는 것은 내가 독을 마시고 남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분노를 알아차리고, 나의 감정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지금, 당장 말이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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