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심리학이다.

글쓰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학인 것이다!

by 스테르담
가장 개인적인 것


'가장 개인적인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개개인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심리'는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개인 본연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저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하지만,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래야지 했던 마음은 전혀 다른 행동을 낳기도 하고, 행동을 바로잡고 나면 다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마음'과 '심리'는 정말로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란 말이 회자되는 요즘이다. 때로는 나도 모르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성공한 영화나, 소설 그리고 다양한 문화들은 개인의 생각과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것을 생각해낸 사람들 마음속엔 무엇이 있었을까?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을 했기에 세계가 열광하는 문화가 만들어진 걸까?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안다. '개인'이 사라진 문화는 허상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를 접하더라도, 그 안에 또다시 나의 생각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마음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가장 개인적인 '나'를 만나는 시간


개인적인 '나'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굳이 방법을 들이대지 않아도, 우리는 나 자신과 매일을 함께 호흡한다. 그러나, 공기의 고마움을 잊듯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꽤 많이 잊고 산다. 그러다 문득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사람들은 심리학 책을 집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내 마음은 그곳에 없다.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내려 노력하는 학문이다.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을 연구하며, 실험을 통해 그것을 규명하려 한다. 사실, 심리학은 그래서 한계가 있다. 사람들 마음에서 떨어진 부산물들에 청진기를 댄다 한들, 마음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 바뀌는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마음'이라는 것이 학문이나 이론으로 규정되느냔 말이다.


심리학을 전공한 나 또한 그러한 회의에 휩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만, 알아가려는 노력은 필요하며 그것이 어쩌면 심리학의 역할일 것이다. 또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인문학의 한 줄기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 그러니, 심리학 책을 읽고 실험을 꼭 해야만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란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글쓰기'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심리학'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만나고, 마음을 표현하며,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를 만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 순간순간을 통해, 또 다른 삶의 호흡법을 깨우쳐 나간다. 코로 숨 쉬는 법과, 마음으로 호흡하는 법. 그 신기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나보다 더 개인적인 우리의 '심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아주 훌륭한 심리학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심리학을 전공하며 배운 것보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세상의 마음을 더 많이 통찰했다.

물론 심리학 이론도 내겐 큰 도움이 되었다.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심리학적 갈망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글쓰기로 번진 게 분명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심리학은 훌륭한 글쓰기라 말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첫째, 글쓰기는 '결핍'으로부터 출발한다.

: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열등감)


나의 지난 글을 보면 재밌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부의 소재가 나의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것들은 나의 부족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을 쓴 것보다 열등감으로 더 잘해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잘하지 못하는 것, 또는 그것에 대한 다짐. 겪어왔던 시행착오 등.


'열등감'은 심리학자인 아들러의 주된 심리학적 재료였다.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느끼고, 더 나은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완성을 이루어나간다고 했다. 더불어, 아들러는 '개인은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라 칭하며 개인심리학을 주창했다.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라는 말이 마음을 울린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것이란 뜻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아들러는 '허구적 최종 목적론'을 긍정했다는 것.

'허구적 최종 목적론'은 허구나 이상이 현실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움직인다는 개념이다. 우리가 쓰는 글엔 이것이 가득하다. 되고 싶은 것, 바라는 것, 이상적인 것을 가득 담아내는 것이 소설, 자기 계발, 에세이 등등의 글쓰기 아닌가. 실현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추구하며,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하나하나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글쓰기는 '결핍'으로 시작해 나의 열등감을 직시하게 하고, 꽤 많은 것들을 극복하게 해 준다.

허구로 추구했던 것들을 실현해내는 기적까지 경험하며.


둘째, 글쓰기는 '무의식'과의 만남이다.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무의식)


나는 글을 쓰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게 될 때 더 그렇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멋대로 하고 싶은 내가 있고, 신과 같이 무결점의 존재가 되고픈 나도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그 둘을 조율하려는 내가 있는 것인데, 프로이트는 이를 명쾌하게 각각 이드, 초자아, 자아로 규정했다. 정신분석학에서 그는 말 그대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분석하여 카테고리화 하고 보이지 않는 개념을 체계화한 것이다.


지금에야 너무나 잘 알려진 이론이라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동요했다.

정신병으로만 여겼던 '히스테리'를 무의식에서 처리되지 않은 과거의 불쾌한 생각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의식에 축적된 성적 욕망인 리비도가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했을 때 더 그랬다.

게다가, 현대 심리학에서는 실험으로 규명할 수 없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불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가 기대했던 심리학과 대학에서 배운 심리학이 많이 달랐던 이유다.


어찌 되었건, 나는 글쓰기를 통해 대학 때보다 더 많이 나의 무의식과 마주한다.

써 놓은 글 속 사이사이엔, 나의 무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쓸 때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숨어 있는 내 무의식과 조우한다.


아, 나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나는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내가 이래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구나.


무의식은 과거를, 초자아는 미래를 그리고 자아는 현실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런 점에서 글을 쓰는 순간에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과거를 회상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거두어 현재를 곱씹으며 미래를 다짐하니까.


셋째, 글쓰기는 '그림자'를 만나게 해 준다.

: 칼 구스타프 융의 원형과 그림자 이론


나는 글을 쓸 때 '융'의 '집단 무의식'을 자주 언급한다.

역사와 문화에 기반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설명할 때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침략을 많이 받았던,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통해 융이 말한 '그림자'에 주목한다.

융은 '그림자'를 한 사람의 인격에 반영된 무엇으로 간주한다. 개인적으로 보면, 성격의 표면상에 나타나 있지 않은 면으로 표면상의 성격을 보완한다고 봤다. 보편적인 범주로 보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양면'이라는 것이다. 햇빛이 강한 날에 우리는 우리 그림자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동전이 있으면 앞뒤가 있듯 우리 마음에도 양면이 있다는 걸 융은 명쾌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단점'이라 일컫는 것들은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변화를 주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뗄 수 없는 것이고, '단점'이란 단어조차도 짧다는 뜻으로 우리는 살다 보면 긴 것도 필요하고 짧은 것도 필요하단 걸 깨닫는다. '단점'을 직시하지 못하면, '장점'도 반감된다. 외형적인 사람도 내향적인 면이 있고, 일처리가 빠른 사람은 차분한 사람의 세밀함을 배워야 한다.


글쓰기는 나를 마주하며 '그림자'의 부분을 일깨워 준다.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림자를 보며 우리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겨난 그림자를 통해 우리의 진짜 모습을 이미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형을 보며 그림자를 깨닫고, 그림자를 보고 원형을 유추하는 반복을 통해 우리는 성장해 간다.


어둡다고 피해왔거나, 부끄러워 직시하지 못하던 그 순간들.

글쓰기는 차분하게 우리의 팔을 이끌어 '그림자' 앞에 우리를 앉혀 놓는다.




이리 생각을 풀어놓고 보니 과연 그렇다.

글쓰기는 나의 결핍으로부터 성장하는 과정을 안내하고, 무의식과 그림자를 마주하게 한다. 묵묵히 내가 커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래서 쓰고 더 쓰라고 격려한다. 어쩌면 글쓰기는 그렇게 나를 대견하게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일지 모른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은, 그렇게 나를 키우고 안내하는 또 다른 차원의 나일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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