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Feb 25. 2020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글쓰기를 이어가는 법

창작의 고통은 내가 글을 쓰고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느낌이 아닐까

창작의 고통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나는 방황한다.

괜스레 책상 위를 정돈하거나, 뜬금없이 스트레칭을 한다. 마음먹은 글 하나를 쓰기 전까지 방을 나서지 않겠다는 다짐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기어이 방을 나서 냉장고에 뭐가 있나 들여다보고, 차분히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뒤에 가 시답잖은 손가락 찌르기 장난을 한다. 훽 돌아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매섭다. 나는 주눅이 들어 다시 방으로 와 모니터 앞에 앉는다. 하얀 여백에 깜빡이는 커서는 마치 날름거리는 혓바닥 같아 약 오르다. 뭔가를 빨리 써내라며 재촉하는 그 얄미운 모습이란. 손가락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있던가를 생각하다 기어이 한 숨을 내어 놓는다.


창작의 고통은 이처럼 매섭다.

대단한 작품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에게는 꽤나 진지한 고민인 것이다. 무언가 마음속에선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쿵쾅대고 있고, 머릿속엔 총체적으로 이런저런 좋은 아이디어가 흩날리는데 아무것도 못하겠는 그 순간. 무기력함이 온몸을 감싸는데 그 느낌은 구체적이다 못해 추상적이고, 추상적이다 못해 구체적이다.


하지만 때론 이런 고통이 즐겁다.

창작의 고통은 능동형 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엔 굴욕감이 들지만, 내가 만들어 내는 고통엔 달달한 구석이 있다. 무기력감에 절룩거리긴 하지만, 고통 속에서 때론 진주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 뒤에 오는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고통스러워도, 아니 어쩌면 그 고통을 즐기며 글쓰기를 이어 간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


사람은 결핍에서 성장하는 법.

창의력이 부족하니, 창작의 고통은 어느새 내 친구가 되었다. 글이 항상 잘 써지지 않은다는 걸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루 하나 이상 글을 쓰자던 욕심도 내려놓게 되었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보단 기다려줄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이어가는 방법도 나름 많이 알게 되었다.


첫째, 제목이라도 쓴다.


나는 내 글의 제목을 '카피라이팅'이라 생각한다.

글의 제목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고, 그 한 줄의 제목은 전체 글을 수렴하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글의 제목을 잘 지으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어떤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보다 제목부터 던지고 보는 경우가 많다. 즉, 내 글의 제목을 '카피라이팅' 하는 것.


재밌는 것은, 그렇게 제목을 던지고 나면 제목에서 많은 이야기가 파생된다.

그 제목을 증명하거나, 잘 표현해내기 위해서 써 내려가는 글이 사뭇 진지하고 재밌다. 이 아까운 제목을 버려선 안된다는 사명감까지 더해지면, 때론 앉은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끝을 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하고 싶은 일하고 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마라'란 글이 그랬다.

제목부터 떠올린 이 글은, 하나하나 살을 보태어 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 훌륭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 글은 결국 '직장내공'의 '맥'이 되어 책의 전체를 아우르며 나의 '철학'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도움을 준 글로 거듭난 것이다.


제목만 써놓고 보는 것의 또 하나 좋은 점은, 제목을 짓고 나서 바로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좋은 제목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언젠간 쓰게 되어 있다. 잘 지어 놓은 제목은 나중에 보더라도, '아, 내가 이걸 표현하고 싶었던 거지?'라며 자각한다. 그래서, 내 휴대폰 메모장엔 아주 좋은 제목들이 흥건하다. 아직 글이 되지 못한 희망이자, 표현되지 못한 게으름. 그럼에도 뭔가 풍성한 느낌이 들어 기분은 좋다.


둘째, 단 몇 줄이라도 쓴다.


자신을 괴롭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행할 수 없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평생 그래 왔다. 작은 성취는 성취도 아니라 생각했고, 높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무능하다 생각했다. 어째,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하면 좀 더 괴롭힐 수 있는지에 대한 공부를 해온 것 같아 전공이 헷갈릴 정도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를 떠올리면, 나를 잘 아는 그러니까 괴롭힐 준비가 된 자아가 튀어나오는 때와 많이 겹친다.

뭔가 대단한 글을 써야 한다거나, 장문의 글 또는 개수라도 채워야 하는 억지 글을 재촉하는 내 모습을 본다. '글쓰기'란 내 생각과 감정의 표출이다. 그 생각과 감정이 꼭 장문일 필요는 없고, 고난도의 완성을 이룰 필요도 없다. 그저 노트에 한 줄, 두 줄만 써도 나는 글쓰기를 한 것이고 성공한 것이라 생각하는 법을 이제는 안다. 정 쓸게 없으면, 지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을 단어로 표현한다. 몇 줄일 필요도 없고, 띄엄띄엄한 단어여도 상관없다.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그것을 표현했으니 글쓰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쓰고, 다시 쓰고, 짧게 쓰고, 길게 쓰고, 많이 쓰고, 쓰고 또 쓰고.


그저 그러면 된다.


셋째, 읽는다.


정말 미치도록 글이 안 써질 때가 있었다.

말을 못 하는 증상을 '실어증'이라 하는데, 글을 쓸 수 없는 증상은 뭘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글을 쓰고 싶어 손가락은 근질근질한데 당최 자판을 누를 수 없는 그 느낌. 아니면 뭔가 자판을 두드렸지만, 형상화되는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마음. 나를 관통하는 글을 지향하지만, 관통은 커녕 수많은 상념과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이 이리저리 비껴가던 그때 그 순간이 정말 생생하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눈 앞에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었는데, 재지 않고 펼친 어느 페이지 그 단락에서 나는 동요했고 거짓말처럼 실어증이 뻥하고 뚫리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리곤 아마도 그 자리에서 서너 개의 글을 연달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글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하고 싶진 않지만, 써내려 가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글쓰기를 하면서 당연한 걸 잊었던 것이다.

글 좀 쓴다고 오만해져 읽는 것을 등한시한 것. 무언가 표현하려고만 하는 마음.

인풋 없이 아웃풋만 바라는 그 욕심이 결국 글쓰기를 더디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글쓰기는 정말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준다.

사실, 오늘도 글을 쓸까 말까 하다 의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보단 일단 모니터 앞에 앉아 보기로 했다. 일단 시작하면 의지가 생긴다는 걸 글쓰기는 나에게 여러 번 가르쳐 주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뭔가가 써 내려가질 거란 걸 나는 직감했다. 그러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제목이라도 남기려 했고, 단 몇 줄이라도 쓰려고 했으며 그마저도 안되면 짧게라도 뭔가를 읽고 마무리하려 했다.


결론적으로, 또 하나의 글이 써졌다.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나는 내 생각과 마음을 또 담았다는 것에 작은 희열을 느낀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 오는 고통.

어쩌면 그것은, 내가 글을 쓰고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느낌일는지 모른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매거진의 이전글 써보면 달라지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