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던, 작가라는 가면을 쓰든 간에.
쓰다
나는 '쓰다'란 중의적 표현을 좋아한다.
보통 우리는 '쓰다'란 표현을 글을 쓰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또 다른 뜻이 있다. 가면을 '쓰다'라는 뜻도 있고, 맛이 '쓰다'란 말도 있다. 물건을 '쓰다'라고도 할 수 있으며, 돈을 '쓰다', 신경을 '쓰다'란 말도 있다. 재밌는 건, 이러한 중의적 표현이 모두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아래와 같이 표현해 볼 때 그렇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란 가면을 '쓰고' 있다. 나의 다른 가면만 알고 있는 어떤 이들은 글을 '쓰는' 나를 공격하며 신경을 '쓰게' 만든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의 배신이랄까. 나는 인생이 '쓰다'는걸 느낀다.
일종의 말장난 같지만, 글을 쓰면서 맞이하는 작금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들이라 나에겐 장난이 아닌 글이다.
글을 쓰니, 작가란 가면을 쓰니 신경 쓰는 게 많아졌다. 물론, 좋은 맛도 있고 쓴 맛도 있다는 건 삶에는 양면이 있다는 진리 아닐까 한다.
써보면 달라지는 것들
이렇게, 써보면 달라지는 것들이 많다.
글을 쓴다거나 작가의 가면을 쓸 때 더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써보면 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상은 그리 흥미롭지 못하다.
아침에 일어나 씻으러 간 욕실에서 마주한 거울 속 내 모습은 마치 일상을 도망치지 못한 소시민의 모습과 같다. 하고 싶은 일보단 당장의 먹고사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초라한 인간. 머리와 마음은 출근하기 힘들다지만 자동적이고 기계적으로 익숙하게 움직이는 손과 팔이 어느새 입 안에 양치 거품을 가득히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일상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려다 실수를 해 떨어진 치약에서도 나는 영감을 얻었다. '뭐든지 항상 잘 해내야겠다'는 내 무거운 마음과 마주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써 내려간 글은 나는 물론 그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까지 큰 도움과 위로가 되었다. 일상 속의 나는 무기력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일상을 써 내려가는 나는 그렇지 않다. 왜 출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글을 써 내려가면 일상은 분명 달라진다.
즉, 글을 쓰면 일상도 특별한 것이 된다.
감정은 한 번 써보는 것이 좋다.
정말 그렇다. 글쓰기 전엔 그저 감정은 느끼고 발산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느낀 대로 반응하고, 반응한 대로 책임졌다. 남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분을 삭이지 못해 무언가를 던져버린 적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고는 많은 것이 변했다. 감정을 글로 표현하면서, 나는 감정을 발산하기 전에 내 마음과 조우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지금 생겨난 이 감정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대화할 수 있었다. 그저 느끼고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하고 이해하고 조절하게 된 것이다. 즉, 객관적인 '나'가 되어 나 자신을 조망하게 된다.
더불어, '불안'이나 '슬럼프'같은 배척하기만 하던 감정과 친해질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글로 써 내려가면 나는 왜 불안해하고 왜 슬럼프에 빠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불안이나 슬럼프가 왔을 때 화들짝 피하기만 하다가, 글쓰기를 통해 그것들과 마주 앉게 되는 것이다. 써 내려가는 글 속에서 우리는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불안이나 슬럼프는 나를 헤치려 다가오는 게 아니라 나의 지금을 돌아보게 하고 오히려 더 괜찮아지게 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좋지 않은 면도 있긴 하다.
내가 써 놓은 감정은 '기록'이 된다. 내가 쓰는 글의 의도와 내용 그리고 목적은, 읽는 사람의 해석을 뛰어넘지 못한다. 더불어, 지금 쓰면서 느끼는 감정과 나중에 그것을 돌아볼 때의 감정은 다르다. 그러니 언젠가 그 글은 누군가에게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혼자 보는 글이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감정을 써 내려갈 땐 어느 정도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창작이나 표현에 영향을 줄 정도라면, 나 혼자 보는 글로 간직하는 게 좋다.
글쓰기의 가장 큰 선물은 '나와의 만남'이다.
이 세상은 자꾸만 '나'를 잊게 만드는 기묘한 재주가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덜 불행해지려고 살다 보면 더 그렇다. 세상은 주로 우리를 그렇게 가지고 놀거나 뒤흔든다. 그러니, 하루하루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한 순간이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함정이다. 정신줄 놓지 말라는 이야기는 결국, 나 자신을 잊지 말란 이야기와 같다.
글쓰기는 이러한 와중에 나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결국 글쓰기는 나에게로부터여야 하고, 내 감정과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나를 안 알아차리려야 안 알아차릴 수 없다. 글쓰기는 나를 관통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는 이유다. 나를 관통하며,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글쓰기다. 이 얼마나 생생하고도 확실한 방법일까.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이 변화엔 긍정만이 존재한다. 나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을 늘려야 하는 것에는 지나침이 없다. 그것이 나르시시즘을 향해도 좋다. 어차피 세상은 우리 자신의 색깔을 자꾸만 옅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글쓰기가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어쩌면 이 글은 '글쓰기'에 바치는 내 감사의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많이 성장했고, 즐거우며 삶에 대한 관점도 많이 성숙했다. 물론, 글쓰기를 통해 받는 오해들과 시기 질투 등도 함께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고난이 있는 법.
한 때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힘들어하다 다시금 깨달았다.
이 모든 건 내가 안고 가야 한다는 걸.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이렇게, 써보면 정말로 달라진다.
글을 쓰던, 작가라는 가면을 쓰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