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현실은 디스토피아
아침에 일어나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나를 즐겁게 해 줄 직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은 언제나 새롭고 흥미롭다. 여기저기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발걸음 가벼운 출근길의 끝에 회사 정문이 보이고, 문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즐거운 인사를 나눈다. 엘리베이터는 내가 지금 출근한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 문을 열어 나를 환영한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본다.
메일에는 어제 요청했던 것에 대한 회신이 와있다. 모든 메일은 나를 배려하듯이 친절하다. 몇몇 메일은 나의 업무역량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빼곡하다. 나도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팀장은 나를 불러 현재 업무의 진행 현황을 묻고, 나는 그것에 자신 있게 대답한다. 나의 대답에 흡족한 팀장은 어깨를 툭치며 수고했다고 말한다.
마침내 오랜 기간 준비했던 보고의 시간.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후 보고석에 오른다. CEO가 참석한 보고지만 그간 열심히 준비를 했으므로 초라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고는 순조롭다. CEO가 고개를 끄덕인다. 몇 가지 질문을 받았지만 모두 내가 아는 범위의 것이거나, 또는 미리 준비한 내용이었다. 사람들의 박수로 보고를 마쳤고 팀원들은 내가 최고라며 두 엄지 손가락을 올려 세운다.
나는 인센티브 대상자에 올랐으며, 승진은 언제나 1 순위.
그리고 후배나 동료, 선배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 회사 생활은 나의 자아를 찾아가고, 그것을 실현해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회사 갈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이렇게 행복한 마음만 있으면 주말에 일을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월요병이란 말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상황을 알 순 없다. 다만, 두 가지는 넘겨짚을 수 있겠다.
첫째, 당신이 바라는 직장 생활은 위와 같다.
둘째, 당신이 맞이한 직장 생활은 위와 정반대다.
우린 모두 큰 뜻을 품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저성장 시대, 가뜩이나 취업하기 힘든 이때에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초심을 돌이켜보면 내가 직장을 바꾸고, 사람들을 바꾸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회사를 먹여 살릴 수도 있겠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즉, 사회 초년생에게 직장은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짙다.
하지만, 길게도 아니고 회사를 일주일 아니 단 하루만 나가봐도 정신은 혼미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방이 적이고, 온갖 욕구불만과 불안이 가득하다. 웃는 얼굴의 사람을 찾기도 힘들고, 웃고 있다 한들 그 웃음이 진정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도 숙제지만,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또 다른 과제가 있다. 즉, 직장의 현실은 '디스토피아'인 셈이다.
죽을 만큼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별이 두려워 만나는 것처럼
한 연인을 두고 고민하는 내가 있다.
처음엔 그 연인에게 집착했다. 그 정도로 절실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함. 하지만 오래 만나다 보니 무언가 마음속이 허전했다. 나는 이 연인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이 연인에 대한 나의 헌신이, 정말로 헌신짝이 되진 않을까? 그렇다면 헤어져야 하나. 나는 고민한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당장 헤어지고 나서 맞이할 변화가 두렵다. 이별이 두렵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결국, 죽을 만큼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별이 두려워 만남을 지속한다.
아마도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 그렇게 고민하고 있거나. 우리는 가끔 무언가를 정말로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 그것을 포기하게 되면 맞이할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무언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고, '회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위의 글에서 '연인'을 '회사'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저 회사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를 뽑아주기만 한다면!
이러한 절실함으로 시작된 직장 생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슬럼프도 오고 권태도 온다. 초기엔 즐거운 마음으로 했던 헌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감을 들게 한다. 헌신짝이 되지는 않을까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정말로 내 삶을 걸 정도로 나의 일과 직장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우리를 괴롭힌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지나가고, 어느새 그러한 결단을 내릴 시점을 놓치고 만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은 어느새 사랑의 보상이 아니라, 이별을 두렵게 만드는 강력한 마약이 된다. 일과 직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퇴사 후의 삶이 두려워 꾸역꾸역 오늘도 직장에 나간다.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곳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울창한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과연 소리가 난 것일까?
짐 배것의 '퀀텀 스토리'에 나온 문구다.
이 무슨 무모한 고민일까 싶지만, 양자역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주 심오한 질문이 된다. 소리를 내는 물리적 속성과, 소리를 받아들이는 경험적 속성으로 해석하면 그 나무는 소리가 난 것이기도, 안 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문구를 마주했을 때, 우리 직장인을 떠올렸다.
우리가 어떠한 성과를 냈을 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성과를 낸 것인가? 아닌 것인가? 즉, 이것은 직장인이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와 결부된다.
직장인에게 있어 '월급과 승진'은 거의 전부와 같다.
그 둘을 빼면 직장인에게 남는 것이 없다. 자아실현을 탐색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직장생활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고상한 거짓말이다. 자아실현의 척도도 '돈과 명예'로 환산되는 요즘 세상이다. 그런데, 이 '월급과 승진'은 결국 '인정'의 산물이다. 내가 직장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것들로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정'을 받아야 인센티브도 받고 승진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직장인은 '인정' 받기를 갈구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도 그렇다. 모두가 그렇다. 말단 사원부터 저기 머리 꼭대기 CEO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같다. 서로가 인정받기를 갈구하다 보니, 서로를 인정하는 것엔 인색하다.
그것이 직장이다.
그래서 힘들다.
나와 직장은 현재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어느 한쪽에 있을까? 아니면 그 어느 중간에 있을까?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가졌던 초심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을까? 죽도록 이 업(業)을 사랑해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퇴사나 해고가 두려워 버티고 있는가? 나는 지금 직장에서 '인정' 받고 있는가? 남을 '인정'하고 있는가?
심리학을 통해 더 나은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현주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즉, 나를 바라보고 직장을 바라보는 것. 나는 직장에서 어떠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직장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먼저 나와 직장의 관계를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그리고 시야를 조금씩 넓혀 직장을 바라보자. 직장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알고 파악해야 우리가 심리적으로 어떤 대응을 할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회사'의 '회'자만 나와도 넌더리가 난다고 회피하지 말자. 그럴수록 우리가 풀어야 하는 과제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그것을 풀어낼 기회를 잃게 된다.
그것이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