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시아 이론'으로 바라본 직장인 정체성
사람은 정체감이 흔들릴 때
가장 힘들다.
사춘기 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소위 말해 질풍노도의 시기. 바람과 파도의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자아에 대한 회의감. 나는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몸은 다 컸어도, 당장 사회적 책임이 덜한 모라토리엄 안에서 청춘은 방황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춘기보다 더 큰 인생의 요동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직장인이 되어 깨달았다.
직장생활, 즉 사회생활의 시작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사춘기를 통해 어느 정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한 수백수천 가지의 것들이 일어나는 곳이 직장이며, 그것은 매일매일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회사'의 '사'자를 활용해 '사춘기'를 표현한 적이 있다.
사춘기(社春期)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기로, 신체적으로는 배가 나오거나 건강이 나빠지는 과정을 겪으며, 정신적으로는 자아의식이 흔들리면서 심신의 맷집이 성숙해지는 시기
-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中 -
직장인의 정체감,
그것은 찾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직장생활의 시작은 새로운 정체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사회적 가면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으로써 내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우선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아니라고 발버둥 쳐봤자, 그건 질풍노도의 시기로 회귀하는 것일 테니까.
정체감은 어떤 특성이나 역할의 집합이 아니라 '심리적 안녕감(Psychological well-being)'의 개념이다.
건전한 정체감은 육체적 편안함, 추구하는 것에 대한 확고함,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내적 확신을 수반한다.
정체감의 안정을 위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사회에서 행동하는 '나'의 언행과 신념이 일치해야 한다.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 눈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자아에 대해 일관되고 안정감 있는 시간적 연속감이 발생하여 정체감을 확립한다.
그런데 '직장'이라는 변수는 우리에게 큰 혼돈을 가져다준다.
평생을 걸쳐 성장하며 정체감 형성에 부침을 겪는 우리네 인생에서 그것의 충격은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 위기는 '개인적 정체감' 대 '역할 혼돈'에 기인한다. 그 둘의 괴리는 도저히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나'자신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보였으면 하는 바람은, 사람들의 다른 생각과 평가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만다. 고달픈 경쟁과 다른 사람과의 갈등, 스스로도 생각하던 신념을 저버려야 하는 순간들. 직장인의 정체감 확립은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순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르시아(Marcia)'의
정체성 지위 이론으로 바라본
직장인 정체감
다행히 심리학에선 이러한 어려운 정체성의 개념을 오랜 시간 연구해왔다.
대표적으로는 에릭슨이 있고, 마르시아는 그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정체감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에릭슨은 전 생애에 걸친 자아 정체감에 초점을 맞춘 반면, 마르시아는 청소년기의 정체성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에릭슨의 '정체감 성취'와 '정체감 혼미' 두 자아개념을 바탕으로, 자아 개념을 4개로 확장하였으며 여기에 민족성이나 소수그룹의 문화적 차이도 고려했다.
마르시아의 정체성 이론이 청소년기에 초점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이를 직장인에게 적용을 하면 소스라칠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
이는, 직장인 정체감의 혼돈 수준이 청소년기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정체감 혼미는 갑작스러운 성장발육과 사고의 전환에서 온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예'란 보호막이 있다. 방황하더라도 명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과 사회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인한다. 하지만, 직장인의 방황은 그리 달달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먹고사니즘과 연결된,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은 직장인에게 방황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자칫 한 번의 잘못된 방황은 미래의 커리어에까지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마르시아의 정체성 이론을 들여다보려면 아주 중요한 개념 2 가지를 알고 가야 한다.
바로 '위기(Crisis)'와 '관여(Commitment)'다.
위기(Crisis): 직업선택, 이념적 신념과 같은 개인적 정체감의 측면들에 도달함에 있어 의문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대안을 탐색하는 시기
관여(Commitment, 전념): 직업선택, 이념적 신념에 있어 확고한 결정을 하고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투자하는 것/ 주어진 역할과 가업에 대한 신념과 관여의 정도
쉽게 말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행동을 했는지에 따라 정체감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럼, 우선 마르시아가 구분한 '위기'와 '관여'의 정도에 따라 정체성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살펴보고, 이를 직장인의 그것에 적용시켜 보자.
1. 정체감 혼미: '위기'를 경험하지도, 그렇다고 '관여'를 하지도 않은 상태
직장인으로 치면 신입사원이나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은 상태.
아직, '동일시'할 상대도 없고 이제 막 대학생에서 사회인으로의 역할 변화에 어리둥절할 때다. 입사할 때의 포부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상(理想) 일뿐 실제 펼쳐진 직장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거기서 오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 당장에 쓸모없어 보이는 탓에 낮아진 자존감은 이제껏 쌓아온 정체감을 인정사정없이 흔들어 놓는다. 목적과 목표는 사라진 지 오래다. 공허함이 몰려오는 때다.
2. 정체감 조기 획득 or 상실: '관여(전념)'는 했지만,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상태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우리나라는 뭐든 '선행(先行)'을 하려 한다. '정체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정체감'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도 전에 사람들은 '공부'에 몰두한다. 일단 선행학습을 통해 그 불안감을 떨치려 든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남들이 다하니까 뒤처지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모여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서 정체감이 조기 획득된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아직 '위기' 즉,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고민 없이 갖게 된 정체감은 곧 상실이나 다름없다. 왜 의사가 되어야 되는지,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가 정해준 진로에 따라 열심히 공부(관여)한다.
직장에 이제 막 들어와 신입을 거쳐 그래도 조금은 일을 해본 사원들이 이에 해당한다. 높은 학력과 역량, 실력을 가졌고 이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공부도 했지만 직장인이라는 타이틀만 거머쥐었을 뿐, 성숙되지 않은 정체감은 이내 상실된다.
3. 정체감 유예: '위기'는 경험했으나, '관여'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
대리 정도의 직급이나 연차가 되면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혼돈의 시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지, 아니면 한시라도 빨리 이직이나 퇴사를 해야 할지에 대한 조급함이 몰려온다.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이직을 위한 취업 사이트나 대학원/ MBA 스터디를 기웃거린다.
신입 사원과 같이 선배들을 마냥 '동일시'하지 않게 되는 '직장인의 자아의식'이 꿈틀대면서, 선배들처럼 '저렇게 살면 행복할까?'를 되뇐다. 이대로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가면 어떡하지란 공포가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의 미래와 정체감 확립에 고민하고 노력한다. 문제의식에 골똘한 나머지 역할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래서 하는 일이 재밌기도, 곧바로 때려치우고 싶기도 하는 애증을 맞이한다.
4. 정체감 확립: '위기'를 경험하고, '관여(전념)'함으로써 안정적인 정체감을 확립한 상태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다고 꼭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해당되는 사람은 어쩌면 없을 수 있다. 다만, 이곳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직급이 올라가면 '위기'나 '관여'의 기회가 많다. 아무리 능력 없어 보이고, 답답한 선배나 상사라도 그들의 겪어왔던 시간들은 존경할 가치가 있다. 각자의 생존 방식으로 버텨온 그들의 노고는, 앞으로 후배들이 맞이해야 할 운명이다.
완벽하게 정체감을 확립하기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간혹 보면 하루하루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멋진 사람들이 보인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그들은 자존감이 높고 타인을 배려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는다. 타인의 가치를 경청하되, 결정은 스스로가 한다. 그저 꼰대라고 생각했던 선배나 상사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 분명 배울 점이 있다.
사실, 직장인으로서 '정체감'을 가지기 가장 어려운 이유는 자신에게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반복되는 하루, 그리고 월급을 받아가며 노예처럼 일한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은 의기소침해한다. 그러면서 '직장인'이라는 역할과 정체성을 자꾸 부정하려 든다.
직장인에게 있어 '직장인'이라는 이름은 스스로와 뗄 수 없는 '역할'이자 '정체성'이다.
정체감이 완벽하게 확립된 사람은 그 직업이나 역할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현존하는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 직업, 위치, 신념과 행동 양식에 따라 정체감을 규정하기도 하고, 규정받기도 한다. '나라는 정체감'안에 '직장인'은 '부분'이긴 하지만 가족이나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곳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면 정체감 확립을 위해 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안고 가야 한다.
직장인은 자주 회의(懷疑) 한다.
월급쟁이라서, 나의 꿈이 이게 아니어서, 부속품 같아서, 하루하루가 반복되어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힘들어서 등. 그런데, 그냥 한 번 인정해보면 속이 한결 편하다. 아무리 어떤 부정적인 회의를 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려도 '나는 나다'. 사실,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보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은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바로 '나'의 그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직장인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되 각자의 꿈이 있다면 그것을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는 것이 정신과 마음 건강에 분명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체감을 확립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정체감이란 확립해서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역할과 가면을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라 생각한다.
그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자아실현'이란 이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