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는 '사회적 가면'이며, 이 가면은 하나일 수가 없다. 즉, '부캐'는 결국 페르소나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회적 현상이 하나 더 붙게 되었다. 그것은 '사이드 프로젝트'인데, 이를 통해 '페르소나'는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예전엔 '페르소나'란 주어지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은 '페르소나'를 스스로 양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멀티 페르소나'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페르소나
나이 들어 보일까 고민했으나, 결국 '격세지감'이란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페르소나'는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써야 하는 가면이었다. '직장인', '부모', '가족', '사회인' 그리고 '친구'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역할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회는 다양하지 못했고, 먹고사는 게 우선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먹는 고민은 사라졌고, 시대의 성장은 멈추었다. 사람들은 조직의 의리보다 개인의 즐거움을 택한다. 줄어든 일자리와 높이 솟은 집값, 그리고 빠듯한 월급은 예전처럼 아끼고 저축하기보단 '개인의 성장'에 기꺼이 투자하라고 이 시대의 사람들을 종용한다.
그래서 '사이드 프로젝트' 시대가 도래했다.
자신의 성장과 경제적 결과도 도모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솔루션.
'페르소나'도 내가 선택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작가라는 가면
'페르소나'는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이다.
반대로,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다. 즉, '나'라는 고유성은 유효하지만 전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이지만 우리 어머니에겐 '아들'이고, 아내에게 나는 '남편'이듯이. 그리고 그 페르소나들, 그러니까 나의 부캐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그 역할을 해내며 배우고 깨우치는 것들이 많으며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어떤 페르소나는 때로는 '본캐', 또 때로는 '부캐'가 되며 인생은 다양해진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작가'로서의 페르소나, 부캐는 내 삶을 정말 다채롭게 한다.
사실, '본캐'와 '부캐'를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 그 중심엔 내가 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우뚝하면 가면의 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 인생을 써나가는 주체적인 작가가 아닌가.
'작가'라는 페르소나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의 가면이라는 것을, 나는 글쓰기를 시작한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