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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7. 2020

글쓰기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

글쓰기가 나에게 주는 값진 선물

글쓰기를 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삶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달라진 관점은 새로운 다짐을 낳는다. 

새로운 다짐은 실천으로 이어지고, 생각과 몸으로 행한 실천은 마침내 삶을 바꾼다. 많은 것들이 바뀌는 그 끝엔 '삶'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인 나 자신의 시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왜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하는 걸까?

나는 그것을 '조절'의 영역에서 찾는다. 만약 우리 삶에 그 어떤 것이든 조절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아마도 우리 삶은 좀 더 정돈될 것이고,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갈등은 덜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다른 한 편으로, '조절'을 할 수 있다는 건 '권력'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조절'할 수 있는 '공인된 힘'을 가졌다는 말이다. 나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힘을 미칠 수 있다는 희열은 적절하게는 '좋은 영향력'이 되고, 과하게는 '권력욕 또는 갑질'이 되기도 한다.


글쓰기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


나는 글을 쓸 때 표현을 하거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조절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온도


온도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다.

온도는 물리와 화학의 범주를 아우른다. 그러나 온도는 우리의 생각에도, 마음속에도 분명 존재한다.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따뜻한 사람', '냉철한 사람'이라 표현하고 말에도 온도를 넣어 '따뜻하거나 차가운 말'이란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개 '차가움=이성', '따뜻함=감성'으로 해석하곤 하는데, 그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오랜 역사와 동서양을 막론한 '사람의 개념'이라는 것에서 수용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땐, 대상이나 글의 장르에 따라 온도를 가변 한다. 

예를 들어, 자기 계발서라면 차갑게 쓰려한다. 그러나 어떤 글은 자기 계발 목적이라 하더라도 대상에게 위로를 전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땐 글의 온도를 좀 더 높인다. 차갑기만 한 조언은 충고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따뜻함이 없는 메시지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에세이라면 그 온도는 좀 더 높여 쓴다. 차가운 머리로 통찰은 얻되, 마음을 통하여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의 온기를 보존하고 글이라는 음식을 담는다. 


손님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 무게


무게는 대표적인 물리적 특성이지만, 이 또한 정서와 생각을 아우른다.

특히, 나는 묵직한 글쓰기를 좋아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거운 글이 아니라 묵직한 글이다. 그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무거운 글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묵직한 글은 울림을 준다. 묵직한 글에는 깊은 의미와 깨달음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무게를 가벼이 해야 하는 글들도 있다.

무거움을 버거워하거나, 묵직함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할 때 그렇다. 이미 마음이 무거운,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과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묵직한 글을 지향하지만 내 마음이 준비가 안된 날. 이럴 땐, 글의 무게를 가벼이 해보는 것도 좋다. 가벼운 글은 경쾌하다. 경쾌함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저 가벼움보다는 경쾌함을 지향한다. 


꽃은 뿌리를 내리고 묵직하게 서있다. 그러나, 꽃이 살기 위해선 가벼운 씨앗을 날려 보내야 하듯이, 우리는 삶의 어느 때에 묵직함과 경쾌함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 것이다.


셋째, 힘


계속해서 힘을 주는 상태를 보고 우리는 '경직'이란 표현을 한다.

'경직'은 근육의 딱딱함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고방식이 융통성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힘을 주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 그 자체는 바로 '융통성'의 부재를 말한다.


글쓰기를 할 때 분명 힘을 주어야 할 때가 있다.

해서 나는 '온 체중을 실어 말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영혼의 무게는 잴 수 없기에, 보다 와 닿는 (무거운, 확실히 예전보다는 불어난) 내 체중을 걸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할 때, 어떤 의미의 중요성을 말할 때. '무게와 힘'을 동시에 싣는 방법 중 하나다.


그러나 힘의 과유불급은 경직이란 결과를 도출한다.

유연하지 못한, 계속해서 잔뜩 힘이 들어간 글은 써지지도 않을뿐더러 읽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힘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압력이 되고, 일방적인 강압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힘을 빼고 편하게 쓴 글과 의미가 더 분명히 전달될 때가 있다.

비바람으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보단, 따뜻한 햇살로 그것을 벗긴 것과 같이.


글쓰기를 통해 얻은 조절의 힘은,
삶에도 적용된다.


위에 언급한 것들은 글쓰기를 할 때 사용하는 것들이지만, (소스라치도록) 우리 삶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린다.


'온도', '무게' 그리고 '힘'.

따뜻해야 할 때와 차가워야 할 때, 묵직함과 경쾌함이 필요할 때, 힘을 줘야 할 때와 빼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만큼의 삶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왔고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가 우리 '삶'에 얼마나 깊게 밀착되어 있는 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글쓰기를 안 할 수가 없고, 안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앞서 '조절'을 하는 자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조절'할 수 있고, 어쩌면 '권력'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권력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건 딱 '조절할 수 있는 마음'까지다. 그게 본질이자 핵심이다. '권력'은 그에 따른 부산물이므로, 부산물에 집중하게 될 때 삶은 오염된다. 즉, 부산물인 '권력'을 수단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인 것이다.


나 스스로를 잘 조절할 수 있는 마음.

그러나 '권력'에 취해 자신을 그 이상으로 높이거나, 그 이하로 다그치면 안 된다. 더불어, 다른 사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좋거나 나쁜 영향력을 뿜을 수 있을 뿐이지, 그것으로 누군가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심산은 허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쓰려한다.

씀과 동시에 나는 내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과한 건 덜하고, 덜한 건 더 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글쓰기를 통해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며, 글쓰기가 나에게 주는 값진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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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모음]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의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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