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것엔 후회가 있기 때문이다. 후회는 했어야 하는 것들과, 하지 말아야 했던 것 사이에 있다. '선택'이란 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결론적으로 지난날의 글쓰기를 시작한 나에게, 나는 그것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다.
글쓰기를 결심하고 그것이 이어지지 않는 것도 괴로움이지만, 글쓰기가 이어질 때 예상치 못하게 맞이 해야 하는 것들은 또 다른 삶의 과제다.
그러나 그 과제는 오롯이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글쓰기가 잘 이어지니,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오니,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니 나는 뭔가에 취했던 것 같다. 나는 동네방네 내가 글을 쓰고 있으며, 내 책이 나왔고, 여기저기 강의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것은 주사(酒邪)였다. 취한 사람이 소리치는 건 다름 아닌 주사다. 취한 사람은 자신이 취한 줄 모른다. 깨고 나서야 깨닫는다.
배움은 지난 것들로부터 란 말이 맞다.
글쓰기를 주위에 알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
나는 글쓰기를 '감당 가능한 도전'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본업이 있을 경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하기에 글쓰기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본업과 병행하면서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고 위험도도 매우 낮기 때문이다. 더불어, 시작할 때 별도의 장비나,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내로남불의 시선이다.
내가 하면 '사이드 프로젝트'지만, 남이 하면 '딴짓'이기 때문이다. 특히, 혹시라도 '딴짓'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 짙은 색안경을 쓴 사람들이 주위에 하나 둘 늘어 난다. 다시 말하지만, 전업작가가 아닌 이상 나의 글쓰기를 알리지 말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첫째, 나의 글쓰기는 안 좋은 것과 연계된다
본업 외의 모든 것은 악(惡)이란 정서가 가득하다.
주 40시간이 되고 여가 시간이 많아지면서 회사에서도 직원 개개인의 휴식과 자기 계발을 장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직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써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직장에서 실수라도 하거나 슬럼프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모든 이유는 글쓰기로 귀결된다.
"요즘 글 쓰고 강의하러 다닌다며? 일은 언제 해?" "요즘 딴짓한다더니, 그래서 실수하는 거 아니야?" "어허, 그러다 곧 퇴사하는 거 아닌가?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
글을 쓰고 책을 냈다는 말을 하면, 그것을 좋게 봐주는 사람 80%와 좋지 않게 보는 사람 20%의 세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원래 현실은 소스라칠 정도로 차갑다. 단언컨대, 90% 이상이 긍정적이지 않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재밌는 건, 다른 사람들이 업무 외 시간에 골프를 치러 가거나, 부동산 보러 다니는 건 문제가 안된다.
그건 보편적이면서도 공통된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더군다나 책을 내었다면, '작가'로 규정된다. '작가'는 보편적이지도 않고, 공통 양식의 범주에 있지 않다.
그러니, '작가'라는 타이틀은 조직 생활에 위배되는 '딴짓'인 것이다.
둘째, 창작 활동에 제약이 된다
나의 가장 두꺼운 페르소나는 직장인이다 보니, 직장인으로서 얻은 깨달음과 의미에 대해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내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은 본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신변잡기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직장내공>이 출판되었을 때 많은 독자 분들이 그곳에서 의미와 깨달음을 찾아내었다면, 내 주위 사람들은 "이거, 누구 부장 이야기하는 거죠?"라며 사례 하나하나를 캐어 각자의 퍼즐을 맞춰 나갔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사례 하나를 쓰더라도 조심하게 된다.
물론, 깨달음이 있다면 쓰지 않진 않겠지만 거침없이 써나가던 지난날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건, 꼭 직장생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친구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혹시라도 쓰게 된다면, 이러한 제약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론, 이건 내 탓이다. 애초에 글을 쓰고 책을 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 나의 업보인 것이다.
셋째, 질투와 시샘
직장은 전쟁터란 말이 있다.
퇴근이 있다는 것 빼고는,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처절한 사투를 빗댄 말이기도 하지만, 직장엔 '적'이 있기에 그렇다.
직장엔 알게 모르게 적이 있다.
내가 만들어낸 적도 있지만, 나도 모르는 적이 있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나에게 못되게 굴어서 싫은 사람이 있지만, 주는 것 없이 괜히 싫은 사람이 있다. 더불어, 나보다 좀 더 앞서 나간 사람들을 볼 때면, 사람으로서 질투와 시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글쓰기라는 '딴짓'은 적들에게 나누어주는 먹이와 같다.
한 번은, 믿었던 사람이 글 전체의 내용은 읽지도 않고 부분 부분을 악마의 편집을 해 메신저로 공유를 한 적이 있다. 요는, 내가 직장 내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썼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 글의 사례는 익명이었고 결론은 나의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교묘하게 중간만 따다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믿었던 사람이 그랬단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다시, 이는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드러내는 것'과 '드러나는 것'의 구분
몰론, 이러한 모든 것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의 결과가 나왔기에 생긴 일이다.
그저 글을 썼는데, 책이 되었고. 책이 나와 강의와 더불어 더 많은 기회를 맞이 했으니 분명 뭔가 튀는 변곡점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숨겼더라도 분명 드러날 일이다.
그러나, '드러내는 것'과 '드러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초반에 내가 '드러낸 것'이 실수였다. 만약 드러내지 않고, 그저 드러났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나았을 것이다. 그 '상황'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요동을 말하는데, 위와 같은 일을 겪으며 나는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글쓰기를 멈춰야 할까, 글쓰기를 선택한 게 잘못이었을까란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롭다.
마치, 표 없이 영화를 보거나 기차를 탔던 불안정한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한 것과 같은 마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영화에 집중하고 차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그 일련의 아픔과 마음의 요동은 글쓰기라는 내 소신의 대가였던 것이다.
마음이 힘들었던 혹독한 그 시간에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멈출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써 나아갈 것인가?"
내 선택은 '글쓰기'였다.
몇 번을 돌아가더라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이마저도 나는 글을 더 잘 쓰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성장이라는 기회가 주어 진다. 어제보다 나는 더 나아졌고, 덜 아파졌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글쓰기 초기에 내가 글 쓰는 것에 대해 함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