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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18. 2016

[너를 만난 그곳] #16. 그래, 여행 시작.

자, 출장이 아니다.여행이다. 여행.

- 1 -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온 카페에서, 그 아이는 여전히 일정 생각에 푹 빠져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태블릿과 메모지에 시선을 오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생이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카페 구석에 앉아 사투를 벌이는 학생.


카페 구석에서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았고, 사이사이로 흩날리는 먼지가 보였다.

여름 가까운 날씨지만 북유럽의 바람은 건조하게 찼고, 나 혼자 다녀올 시간이 얼마 될지 몰라 안쪽에 자리를 잡았었다.


앞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에 빠져 집중하는 모습, 그 자체가 좋아 보였다.


나는 요 근래 무언가에 저토록 빠져본 적이 있던가.


- 2 -


"잘 돼가?"

내가 잠깐 나갔다 올 때까지 고개를 한 번도 안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깜짝 놀라 했지만 고개는 바로 들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깜짝이야. 응, 뭐. 잘 하려고 하고 있어. 네덜란드에서 그래도 좀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여행은 다른 나라로 많이 다녀서 일정 짜기가 쉽지 않네. 아저씨는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오늘 아침이었다.

어제 이별을 한 친구라서 그렇고, 앞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낼 거니까 말 편히 하라고 했었던 건.

근데, 이렇게 바로 말을 짧게 하는 친구는 처음이었다.


말을 편히 하라고 하면 보통 '오빠'라는 호칭을 쓰며 말은 존댓말 쓰는 것을 기대하는데...

이 아이는 말은 반말을 하고 호칭은 꼬박 '아저씨'란다.


말 편히 하라니, 정말 자기 편한 대로만 한다.

너랑 나랑 띠동갑을 훌쩍 뛰어넘는....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꼰대 소리 들을까 참았다.


- 3 -


"근데, 넌 꿈이 뭐냐?"


"아저씨, 꼰대야?"


그 대답에 한 입 가득히 담았던 하이네켄 맥주를 뿜을  뻔했다.

젠장, 결국 꼰대 소리 듣고 말았네.


"왜 그런 걸 물어. 그러는 아저씨는 꿈이 뭔데? 여행하러 왔다며. 그럼 그냥 여행이나 하자. 나, 꿈 그런 거 없어. 그냥 하루하루 사는 거야. 엄마 아빠가 보내준 돈으로  여기저기 여행하고, 잘 놀고. 잘 먹고. 그러고 있어. 그러다 보면 뭐 꿈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게 생길 수도 있겠지. 안 생기면 말고."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꿈을 묻는 사람 치고 자기 꿈이 확고한 사람은 별로 없다.


- 4 -


"근데, 아저씬 이름이 뭐야?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자기 할 말 다하고 뚫어져라 태블릿을 바라보던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 여행하러 왔으니 여행이나 하자... 이름은 알아서... 무얼...."


"이봐요 아저씨... 아재 개그 그만하시고요. 삐치지 마시고요.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

(아... 삐친 거 어떻게 알았지?)


"야, 근데 누가 보면 우리  몇십 년은 알고 지낸 사람이라 생각하겠다. 좀 살살 좀 말하면  안 될까?"


"알았어, 하는 거 봐서."


당돌하지만 귀여운 것이 뭔가 새로웠다.

언젠가 소개팅에서 만난 나이 어린 여대생이 밥 값을 계산하던 새로움이 문득 떠올랐다.


정확한 나이차이는 16살이었다. 90 몇 년 생인데, 계산도 잘 안된다.

이름은 조금은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그 나이 또래에서는 유행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이름과 나이를 들은 그 아이는 그래도 내게 나름 동안이라고 말해주었다.

조금 놀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래도 진심이었으리라 믿고 있다.


정말이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또 이상한 소리 들을까 봐.


- 5 -


그 아이는 일단 암스테르담을 둘러보고 유명한 몇 곳을 몸풀기 식으로 돌아보자 했다.

나도 크게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무계획 중에 생긴 일이라, 그저 재밌다고 느끼고 있었다.

언제까지, 며칠을 더 함께 하게 될진 몰랐지만 있는 동안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나름 좋았다.


그래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함께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만난 것도 무계획이니, 헤어지는 것도 계획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진다는 표현이 참 웃긴 만남이지만,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그래도 있을 땐 좀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도 이런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잠시 있다 가는 인연이니 그리 크게 맘에 두거나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6 -


첫 목적지는 암스테르담 시내였다.

이 곳 Leidseplein도 암스테르담 시내였지만, 그래도 스테담하면 중앙역부터 이어지는 담락 거리, 담광장 그리고 뒤편으로 이어지는 홍등가가 암스테르담의 상징 이리라.


홍등가는 출장 와서도 몇 번 잠깐 둘러본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가보려 하니 뭔가 새로웠다.

기억에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며 늦은 밤까지 불야성을 이루는 활기찬 거리였다.


보통 유럽의 밤거리라면 쥐 죽은 듯 고요한 곳을 연상하지만 암스테르담은 달랐다.

활기차고 또 활기찼던 것 같다. 그러기에 많은 유럽 사람들도 암스테르담을 찾는다고 한다.


자, 출장이 아니다.

여행이다. 여행.


대학교 때  무산되었던 여행.

세상을 등졌으면 오지 못했을 여행.

큰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내게 줄 수 없었던 여행.


예상치 않게 당돌한 한 아이와 함께 하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행이라니 좋다.


그래, 여행.

몸도 마음도  준비되었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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