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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02. 2020

놓지 못하는 마음

충격을 주어서라도 알려주는 나의 삶에게, 나는 감사함을 전한다.

삶에 그 어떤 충격이 왔다.

크기와 위력으로 따지자면, 어떤 행성이 지구로 달려와 그 공전궤도를 바꿔버릴 만큼의 그것이다. 그렇다고 지구가, 내 삶이 멸망한 건 아니다. 오히려 빙빙 돌던 길을 수정해줬고, 세상엔 다른 좌표도 있다고 그 충격이 말하는 듯하다. 아니, 멸망 또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멸망은 끝을 말하고, 다시 시작되는 어느 시점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충격'이란 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 이야기다.

원래, 깨달음은 뒤통수를 맞을 때 가장 큰 법 아닌가.


기어이 가야 하는 길, 갔어야 하는 길의 궤도가 바뀌면 사람은 불안하다.

전에 없던 일들이 벌어지고, 가보지 않은 길로 발길을 옮기며 내내 편하지 않은 것이다. 삶의 목적과 목표라고 믿어왔던 것들을 송두리째 놓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렇게, 번뇌는 그것으로부터다.

지금까지 쥐고 있던 걸 놓고는 다시 나를 돌아봐야 하는데, 쥐고 있던 힘의 관성과 놓으면 신기루와 같이 모든 게 허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놓지 못하는 마음의 근간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에 있는 걸 쥐려 한다.

갓난아기들의 오므려진 손에, 손가락 하나를 넌지시 얹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미약한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그 손가락을 꼭 부여잡는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 세상에 나와 숨을 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기 위해 무언가를 붙잡고 본다. 

그러한 인생은 계속 이어 진다. 쥐고, 또 쥐고. 쥐지 않으면 뒤처지고, 쥐고 있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정서가 세상의 이치란걸 배워가며.


그래서다.

무언가를 놓는다는 건, 유쾌하지가 않다. 아니, 유쾌하고 말고를 넘어 그것은 삶의 고통이다.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본능에 반하는 일이므로 두렵고 공포스럽고 못내 괴로운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충격이 와야 우리는 놓는 법을 강제로라도 배우게 된다.

이 길과 저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는데, 두 길을 향한 이정표를 놓고는 놓지 않으려는 발버둥. 어리석음을 알겠으나, 놓지 못하는 마음은 기어이 미련하고 서글프다. 그러다 어느 한 손에 충격이 가해져 비로소 그 이정표를 놓아야 하는 때를 맞이 한다. 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보단, 한 번의 따끔함으로 어느 한쪽을 놓는 게 사는 길이다.


나는 결국 알고야 말았다.

양쪽을 다 붙잡고 있으려는 고집과 욕심이 크면 클수록, 그 충격은 비례하여 커진다는 걸.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이 길은 내가 걷고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설령 등을 떠밀었더라도 어느 일정 부분은 나의 선택이기도 하다.


'선택'은 어느 하나를 쥐고, 어느 하나를 놓는 과정이다.

모든 걸 쥐려 하는 나의 욕심은 이제, 삶이 주는 충격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게 중요하다는 걸.

듣지 않으려는 나에게 충격을 주어서라도 알려주는 나의 삶에게, 나는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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