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정확히는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늙은 날이다. '젊음'이란 말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든다. 마치 자신은 늙지 않을 것 같다는 망상에 빠져 오늘을 허투루 보내거나, 내일을 기약하는 습성은 과연 젊음으로부터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긴 연휴를 앞두고 있는 나와 같다.
연휴의 초입에, 나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시간 있을 때 해야지 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어느새 연휴의 마지막에 와있다. 더불어, 연휴 때 해야지 했던 것들은 손에 쥐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이 흘러 후회와 자책만이 고스란하다.
그러니까, 젊음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과 내일이 있다는 오만으로 뭉개진다.
그것 또한 젊음의 특권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권리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지금 내가 그로 인해 받는 책임은 맛이 참 쓰다.
젊은 날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던져준 숙제일 수도 있고.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은교' 중에서 -
나는 이 대사를 생각할 때마다 소스라친다.
'너희도 늙는다'란 말은 와 닿지 않지만, 이 말은 가슴을 후벼 판다. 더불어, 오늘은 나의 가장 늙은 날이라는 깨달음이 엄습한다.
'늙는다'란 말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젊음'이라는 말에 우리가 집착하는 이유다. 그러나 재밌는 건, '젊음'과 '늙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단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떠올린다. 주름, 흰머리, 초라한 몸뚱이. 불편한 마음은 그것으로부터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면 생각이 좀 바뀐다.
나는 어제보다 성숙해졌고, 덜 흔들리며, 보다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느낌. 나이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늘어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젊었을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좀 더 자랐고, 정체성을 찾아 헤매기보단 지금의 내 모습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성숙한, 포용의 그릇이 가장 큰 때일지 모른다.
그것이 늙는 것에 포함된다면, 나는 기꺼이 늙음을 받아들인다.
마냥 흔들렸던 젊은 날도 아름답지만, 조금은 덜 흔들릴 줄 아는 지금.
어차피 흔들림은 평생이기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추구하며 늙어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 과정을 사랑할 줄 알게 될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