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흔쾌히,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 서겠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청명한 날씨, 가벼운 몸. 온전한 생각과 자책감으로 마음을 짓누르지 않는 자아. 주말 아침 게으른 나를 토닥여 밖으로 나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세상을 모두 다 가진 느낌. 나를 위해 모든 게 준비된 것 같다는 즐거운 착각. 지금 이 순간은 무엇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행복인 건가?
이걸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한 나 스스로에게 적잖이 놀랐다.
그러니까, 나는 '이게 행복이야!'라고 단정 짓지 못한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는데, 나는 왜 그것이 행복이라고 단정 지어서 말하지 못했을까?
행복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실재'하는 건 만질 수 있거나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은 그렇지 않다. 만질 수도 없고, 유지되지 않을뿐더러 객관적이지도 않다. 그러니까, 내가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행복'은 바스러진다. 이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에 대한 생각이 엄습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이게 행복이야'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그 말속엔, 행복을 박제하려는 욕심이 그득하다. 그것을 붙잡아 더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거나, 내가 원할 때 꺼내어 볼 수 있을 거란 착각과 함께.
'행복'은 그렇게 수감되거나 박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없는가?
그렇다. 나는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존재는 경계의 면에 서있다. 요동하고 흔들린다.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양극단의 존재는 없다. 즉, '행복한 존재'를 꿈꾸는 건 허망함이다. '행복'이라는 어느 한 면만 고집할 때 삶은 오히려 더 혹독해진다.
다만, 나는 존재함으로 '행복'과 '불행'을 오갈 수 있다.
'행복'은 규정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다가왔을 때,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놔두어야 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자가 말했다.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를 '행복'으로 치환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리고, '도'는 '행복'을 포괄함과 동시에 그것과 다르지 아니한 개념이다.
나는 흔쾌히,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 서겠다.
행복을 박제하지 않으려는 나의 다짐이자 스스로 어떤 개념에 수감되지 않으려는, 자유를 향한 나의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