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침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영 헷갈린다.
깨달음이 달갑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대개 나의 못남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만약 완벽한 존재라면 나는 무언가를 깨우칠 일이 없을 것이다.
물론, 깨달음엔 희열이 있다.
알지 못하던 걸 안다는 건 삶의 묘미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도 깨달음은 오는데, 이럴 땐 희열이 배가 된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뻔해 보이던 것들이 반짝반짝 빛난다면 삶은 얼마나 즐거울까.
한 영화를 10번 넘게 본 적이 있다.
전체 줄거리를 꿰고 있음에도, 이전엔 알아채지 못했던 주인공들의 움직임과 그저 흘려 들어 잃어버릴 뻔한 의미 심장한 대사 속에서 나는 희열했다. 아마, 100번을 넘게 봤더라도 그 새로움과 깨달음은 계속해서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삶은, 그렇게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과 같다.
일상이라는 뻔한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다 알 수가 없고 그것들은 영 새롭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왜 한 번에 영화를 다 이해할 수 없는가. 왜 삶은 항상 알지 못하는 것들의 향연인가. 때로는 한 번에 이해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일어날 일들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갈 때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무엇이 모자라 우리는 항상 깨우쳐야 하고, 무엇을 잘못해 우리는 부족하고 못남을 스스로 고백해야 하는가.
살아오는 동안, 깨달음이 늘면 늘었지 줄진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이를 삼키며 아는 것은 많아지는데, 깨달음은 늘어난다는 건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깨우침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영 헷갈린다.
나는 가끔, 삶을 마치고 어느 초월적인 곳에서 내 인생을 TV로 보는 상상을 하곤 한다.
뒤로 돌리고, 앞으로 돌리고. 백 번, 천 번 보면서 웃고 울고 한탄하고 위로하고 후회하고 감동하며. 아마, 그 과정에서도 알지 못했던 장면과 대사는 생을 마감한 나에게조차 그 어떤 깨달음을 안겨 줄 것이다.
깨달음은 이 세상에 수감되지 아니하고, 저 세상에서도 유효할 거란 느낌적인 느낌.
때로, 깨달음이 달갑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