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남지?
어렸을 적 장래희망이 '직장인'인 사람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대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일반화의 오류'는 일반화된 어떤 것에서 예외가 있다는 말이므로, 예외를 제외하면 일반화를 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단어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를 마냥 부정적으로만 보진 않는다.
고되고 힘들고, 경쟁과 생존을 하다 보면 아니꼽고 도망가고 싶은 일들을 많이 맞이하지만, 결국 나를 키우고 성장시키고 강하게 만든 건 팔 할이 직장이기 때문이다. 원래 삶이란, 원하지 않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더 많이 배우게 되고 그것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내재화된다.
그럼에도 힘든 건 힘든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명제가 통하는 혹독한 정글 속에서 직장인은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다.
자신을 지키면서, 그리고 성장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며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나를 지키는 '세 마리 용'!
오랜 직장 생활을 해오면서 소위 말해 산전수전을 겪은 바, 나는 갈리고 닳고 다듬어졌다.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과 감정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인생 그 자체를 배웠다고 할 수도 있고,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을 마주하며 힘들었지만 희열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나를 지키는 '세 마리 용'을 떠올린다.
그것은 바로 '수용', '포용', 관용'이다.
언뜻 들으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생각하면 그 의미가 정말 다르다.
그 '다름'을 깨우치는 만큼, 세 마리 용은 나를 더욱더 지켜 주고 있다.
파도를 마주 보고 수영을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해보지 않아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 것이다. 수영을 해서 어느 해역을 횡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에 도전하지 않는 걸 추천한다. 우리는 바다와 싸울 수 없고, 싸워 봤자 손해 보는 건 우리다.
회사와 직장은 바다와 같다.
그 파도의 세기와 물의 깊이는 우리가 택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집에서 멀고 먼 사무실의 위치 등.
'수용'의 사전적 뜻을 찾으면 그저 받아들인다는 것 외에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삼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내 것으로 만드는 그 과정.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마음 가짐. 파도와 싸우는 게 아니라, 파도를 타고 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스스로 평생 할 기회가 없을 일이다.
더불어, 해보지 않았거나 잘 모르는 일을 할 때 우리는 기대보다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 한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사람 대하는 것을 배우고, 그런 사람들에게 나를 어필하며 정치력을 키운다. 집에서 먼 통근 시간을 활용해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수용의 지혜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우선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 없이 툴툴대기만 한다면, 정작 힘든 건 나다. 그리고 손해 보는 것도 나다.
파도와 싸우지 말고,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그 어떤 방법을 기어코 찾아내야 한다.
포용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라니. 참 어려운 말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우리네 문화와 정서는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데 익숙하기까지 하다.
나에게 '있는 그대로'는 익숙하고 정당한 것이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각자의 '있는 그대로'는 내 그것의 결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다름 아닌 나를 위해서다. 직장 생활에서 '포용'하지 못했던 내 지난날을 돌아보면 스스로가 참 안타깝다. 남을 포용하지 못했을 때, 결국 힘든 건 나였고 모든 화살은 나에게 되돌아왔다.
포용하지 못할 때, 우리 자신은 공격성을 드러 낸다.
남을 있는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내가 어찌 바꿔 놓겠다는 오만은 직장 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발상이다. 그 대상이 설령 나이가 어린 후배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러해선 안된다. 더더군다나 요즘 세상에선 더 조심해야 할 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포용하지 못했던 상대가 같은 조직에서 나보다 더 빠르고 높게 치고 나간다면, 삶은 더 피곤해진다.
포용하기가 힘들면, 포용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아무리 상대의 모습과 말투, 행동과 사고가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는 이게 맞듯이, 저 사람에겐 저게 맞겠다는 생각.
장담하건대, 포용함으로써 얻는 모든 이득은 본인의 것이 될 것이다.
하이에나처럼 남의 실수를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어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려는 사람들. 주위 사람들은 당장 그를 두려워하거나 따르는 척 하지만 진심과 마음은 저 멀리에 있다.
관용은 남의 실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더불어 너그럽게 용서하는 마음이다. 메일을 보내고 유첨을 잊은 후배에게 크게 나무라거나, 전체 이메일로 회신해 망신을 주는 일은 하지 말자. 내가 이 사람의 실수를 가장 먼저 알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우위를 점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겠지만 그것을 곱게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게다가, 그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므로 그랬던 내가 실수라도 하면 더 큰 망신은 내 몫이고, 나도 모르게 내가 키운 적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다.
어느 한 드라마에서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란 대사를 히트시켰다.
나는 "관용은 돌아오는 거야!"란 말을 히트시키고 싶다. 히트가 안되면, 나라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려 한다. 그것은 사실이며, 진리이고 몸소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 관용은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많이, 자주 관용을 베푸는 것이 좋다.
'수용', '포용', '관용'.
나를 지키는 세 마리 '용'이라 했다. 이 얼마나 든든한가.
그것들이 미숙할 땐 용이 아닌 뱀이 되어 나를 물곤 했지만, 지금은 큰 용이 되어 나를 지켜 내고 있다.
아직도 수용하지 않고, 포용하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 못해서 감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상황은 힘들더라도 그 세 마리 용은 나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깨달음을 곱씹게 한다. 스스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면서.
깨달음이 아둔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의 깨달음이 큰 만큼 과거 내 아둔함의 크기도 컸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모든 과정과 결과를 수용하고 포용한다.
더불어, 지금도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한다.
그 모든 건, 다름 아닌 나를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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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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