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Jul 07. 2020

라떼인지 아닌지는 남이 정한다

그러니까 꼰대가 될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다


이미 우린 꼰대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그건 라떼가 되기 때문이다. 꼰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내가 생각하던 꼰대들이 꼰대가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아니라고 하는데 누군가에겐 꼰대일 수 있다. '지난날'을 이야기하거나 '나의 어느 때'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꼰대가 되는 세상이고, 나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이라도 하지 않았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는 사람이 어찌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경험이 곧 삶이고, 삶이 곧 경험인 우리가 어떻게 그 둘을 뺀 언어들을 구사할 수 있느냐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꼰대가 된다. 아니라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건 내가 사람이 되지 않겠노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내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꼰대가 되지 않겠다고,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꼰대가 될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미 꼰대이고, 꼰대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독자의 해석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내 조언은 상대의 해석을 뛰어넘을 수 없다.


글을 쓰며 많이 느낀 것인데, 내가 글에 담은 의도는 독자의 해석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내 책에 대한 서평을 보면 정말 감명 깊게 공감하고 읽었다는 글도 있고, 그저 그런 이야기를 뭘 이리 장황하게 썼냐는 표현도 있다. (물론, 전자가 더 많아 다행이지만.)


영혼과 경험을 300%를 넣고 갈아 넣어 썼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반 자기 계발서와는 달리 내 성공과 실패를 고스란히 넣어 진정성을 담았다고 내가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다. 

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좋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내 글이 좋은 글인지 아닌지는 남이 정한다.

그러니까, 내 조언과 의도가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상대방이 정하는 것이다.


꼰대에게 실망해봐서 그걸 아는 사람들은 최대한 조심하며 후배들에게 조언이나 의미를 전달하려 한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라떼가 된다. 

의도는 해석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날의 기분을 넘어서지 못하고
상대의 정서를 넘어서지 못한다.


내 입을 떠나 주문이 들어간 라떼를 의미 있게 받아먹는 사람도 있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천사가 되고자 하는 욕심과, 내가 어느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오지랖은 나이가 들수록 줄여 나가야 한다.


'판단'하지 말고,
'선택할 기회'를 주고.


아무리 이미 우리가 라떼를 외친다고 한들, 그럼에도 우리는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의 유형이 무엇인지는 안다.

정답은 몰라도 오답은 알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오답은 자신의 조언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제 멋대로 '판단'하고 내 뜻을 '강요'하는 것이다.

"너 그러면 안돼!"
"이건 이렇게 해야 해. 너 잘못 살았어."
"이렇게 해봐. 무조건 돼. 네가 안 해서 그래!"


나의 라떼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내 라떼가 맛있는지 없는지를 '선택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받아 든 사람은 충분히 향을 느끼고 맛을 음미한다. 맛있으면 즐겁게 잔을 비울 것이고, 맛이 없더라도 이번 기회에 라떼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 의미를 두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직장내공'에서 언급했던 '역꼰대', 즉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마저도 듣지 않거나 상대를 무조건 꼰대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기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도 좋다.


언젠가 깨달음이, 그 상대방에게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지고 몰려올 때가 있을 것이다.

'판단'하지 말고,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면 말이다.




사실, 라떼는 죄가 없다.

어쩌다 발음이 비슷하여 생겨난 오해에, '라떼'라는 말을 듣고는 커피의 향보다는 잔소리가 먼저 생각나는 시대다. 그러니 억울한 건 꼰대도 아니고, 꼰대라고 오해받는 사람도 아니고, 역꼰대도 아니다.


가장 억울한 건 '라떼'인 것이다.


쓴 커피에 우유를 넣어 그 맛을 부드럽게 한 걸 보면, 쓴소리도 라떼처럼 부드럽게 전할 수 있어야 함을 떠올려 본다.


때론, 할 말을 해줘야 할 때도 있으니까.


인기 관리하느라 그 어떤 조언도 주지 않는 사람보다, 필요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낫고, 필요한 말을 할 때 그것이 좀 덜 쓰게 우유를 타주는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나는 분명 그렇다고 믿는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이전 11화 직장인 '3용'을 기억할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