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평정심' 찾기
평정심
참 직장인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들의 직장 생활은 어땠나요? 평정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평정심의 뜻은 '감정의 기복이 없이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직장에서 감정의 기복 없이 평안하고 고요했나요? 질문하는 저도 다소 민망합니다.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니란 걸 알아서겠죠.
그런데 이제 보니 '평정심'이란 단어의 뜻이 정말 비인간적으로 보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니까요. 아마도 그건 AI에서나 가능한 일일 겁니다. 아니, 영화에서 보면 AI마저도 감정에 휩싸여 결국 인간을 돕거나 해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쯤 되면, '평정심'이란 단어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전쟁터와 같은 직장 생활
흔히들 직장을 전쟁터에 비유합니다.
직장과 전쟁터는 '생존'을 그 공통분모로 합니다.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란 명제가 소스라치듯 팔딱 거리며 살아 있는 곳입니다.
같은 월급쟁이들끼리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지지고 볶고 괴롭히지 못해 안달입니다.
아, 저는 그 이유를 압니다. 오랜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내린 결론은 '같은 월급쟁이'여서 그렇습니다.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꼴 보기 싫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 상사, 못돼 먹은 후배와 나보다 한 발 아니 두 발 떠 앞서 나가는 동료.
거기에 풀리지 않는 온갖 문제와 주어지는 과중한 업무까지. 그러니, 감정의 기복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가끔 직장에 있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입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만, 이미 마음과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하며 360도 회전을 하고 맙니다.
그나마 직장생활이 진짜 전쟁터보다 나은 것은, 그래도 하루 중 언젠간 퇴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독한 퇴근길에 그 날 하루의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는 왜 이렇게 평정심이 없을까?'라며 스스로를 다그치곤 합니다.
'평정심'에 대한 오해
그런데 문득 제 마음을 돌아보다 생각을 달리 해봤습니다.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서 감정 기복이 없을 수 있을까? 마냥 평안하고 고요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는 곳에 나는 있는 건데 내가 잘못한 건 또 뭘까?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정심'은 감정의 기복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흔들린 마음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다시 편안하게 만드느냐'의 의미로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평정심 찾아라'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던 겁니다. 직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평전심'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컸던 겁니다.
다만, 우리네 직장인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 감정의 기복을 얼마나 현명하게, 얼마나 세련되게 다루느냐입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면 직장에선 '하수' 취급을 받습니다. 절대로 그래선 안됩니다.
평정심을 잃었을 때 우리는, 그 감정에 매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평정심을 잃었다고 스스로를 탓하며 화를 키우기보단,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 조금이라도 더 편한 마음으로 만들까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친 직장인이 추구해야 할
마음의 지향점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Homeo(Same)와 stasis(to stay)의 합성어로 외부환경과 생물체내의 변화에 대응하여 순간순간 생물체내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 쉽게 말해 가장 알맞은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을 의미한다.
심리학엔 '호메오스타시스'란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항상성'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생리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몸은 '항상성'을 유지하는데 천재입니다. 예를 들어, 외보 기온이 떨어지면 몸을 떨게 하고, 기온이 높아지면 땀으로 열을 조절한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더 쉽게 설명해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샤워를 위해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물 온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배가 너무 고프면 문제고, 너무 많이 먹으면 불쾌합니다.
이러한 생리적 항상성 개념을 심리학에 연결한 사람이 미국의 생리학자인 캐넌(Cannon, Walter Bradford)입니다.
감정이 소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했던 그는, 그의 저서 [몸의 지혜, 1932]에서 각종 신경계가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는지 주목하고 서술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느 항상성이 확보되는 어느 '중간 지점'을 지향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평정심' 찾기
감정의 기복이 생겼을 때, 평정심을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누군가는 욕을 하거나, 무언가를 집어던지거나 심하게는 타인에게 위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독서를 하거나, 음악을 듣고나, 차 한 잔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도 합니다.
자, 어떤 게 더 세련된 방법일까요?
'호메오스타시스'를 추구하는 여러 방법 중에 우리는 더 좋은 어떤 것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선택은 내 생존의 '질'과 '양'을 늘리는 쪽이 되어야 합니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욕을 하고 무언가를 집어던진다면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생존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도출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정의 기복을 잘 다스리고 자신만의 '항상성'을 잘 찾아가고 유지한다면 생존의 확률은 더 커질 겁니다. 그것도 더 세련되게, 자신을 지키고 성장시키며 말이죠.
그러기 위해선 내가 감정의 기복이 있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스스로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나의 언어, 말투, 행동 그리고 마음. 이미 엎질러진 물은 그대로 두고, 이제부터라도 잘 돌아봤으면 합니다. 저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많지만, 그것들을 보며 내가 무엇을 엎질렀는지를 하루하루 곱씹고 있습니다.
돌아 보면, 오히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감정이 흔들렸다고 자책하고 다그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평정심'에 대한 오해.
평정심은 감정의 기복이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흔들린 감정을 어떻게 세련되게 되돌리냐의 문제란 걸 알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원하는 '호메오스타시스'의 지점이 어딘지를 귀 기울였으면 합니다.
이게 바로 전쟁터, 아니 직장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