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장애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없다
'극기(克己)'는 나에게 친숙한 단어다.
나는 언제나 극기하길 원했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란 생각에서였다.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를 오가는 시대에 살았던 나에게 '극기 훈련'이란 프로그램 또한 자연스러운 기억이자 과정이었다.
'극기'는 그렇게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굶주리지 않으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공동의 목표를 완수해야 했다. 이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정서와,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이 공존하며 사회를 굴렸다. 그러니, '나'는 사랑하고 아낄 대상이 아니라 이겨내고 다그쳐 뒤처지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시대를 초월한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자기 계발서는 서점의 주요 매대를 아직도 차지하고 있다. 그 책들은 나에게 왜 새벽 일찍 일어나 활용을 하지 못하는지, 왜 아직 부자가 되지 못했는지, 다양한 SNS를 활용해 돈을 벌지 않고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은 수두룩하고, 그러다 보니 나는 나를 더 극기해야 한다는 마음에 초라한 자신을 더 다그치고 만다.
돌아보니, 그 악순환을 이어 붙인 게 내 삶이었다.
지금에 와 '극기'라는 단어를 다시 찾아봤다.
'나를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단어에서, 나는 다시 놀라운 걸 발견해냈다.
극기(克己)
자기의 감정이나 욕심 따위를 이성적인 의지로써 눌러 이김
- 어학 사전 -
아, '극기'는 나를 괴롭히고 나를 이겨 먹는 게 아니라, '감정'이나 '욕심'과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내 계획이나 내 의지를 어지럽혔던 건 나 자신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무언가를 이루어내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것이다. 그런 나를 다그쳐 못났다고 해왔으니 나는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나는 나와 싸우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바라봤어야 했다. 즉, 마음을 풀어놓아 왜 그러한 '감정'과 '욕심'이 생겼는지를 물었어야 했다.
엄밀히 말해 '감정'과 '욕심'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샌가부터 그것들을 '나'와 동일시 해왔다. 그것들은 동일시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겨내야 할 것이 바로 그것들이란 말이다.
인생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장애물이란 말 조차 없을 것이다. 나는 살아 남기 위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왔고 그만큼 많은 장애물을 만나왔다. 즉, 장애물은 세상이 나에게 던진 것도 있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장애물도 있다는 것이다. 그 개수를 따져 묻는다면, 나는 후자 쪽이 훨씬 더 많았다고 회고한다.
나 자신을 장애물로 규정하는 순간, 이 세상의 그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없다.
'나'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었다고 쳐도, 그 결과는 그리 기쁘지 않다. 나는 당장 이겼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패배한 상대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나'는 서로를 장애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다른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사이다. 내 키를 훌쩍 넘는 벽을 넘을 방법은, 둘 이상의 힘 밖에 없다. 밀어주고 끌어 주거나, 높이 점프를 할 수 있게 누군가는 지지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내 인생의 장애물은 내가 아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장애물들도, 지나고 나면 장애물이 아니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야 나는 비로소 움직였고, 그것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고군분투하는 사이 나는 한 뼘 더 자랐다.
이리 보면, 이 세상에 장애물이란 게 있었나, 있을까 싶다.
나는 더 이상 장애물을 만들어 내거나, 그것에 대해 운운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묵묵히, 나와 손을 잡고 그것을 함께 넘어가자고 나지막이 읊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