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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27. 2021

(해내기 위해서) 애매함을 즐기는 지혜

고르지 않은 삶이 우리를 기어이 움직이게 만든다.

애매함에 대하여


'애매함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이 질문은 애매하지 않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답한 사람이 '애매함' 그 자체가 된다. 그 누구도 '애매한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줏대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것'과 '나쁜 것' 둘 모두를 선택하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이러한 개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한다. 좌파니 우파니, 꼰대니 아니니, 부자니 가난하니 등. 중간이란 없다.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면 '회색분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개념화된 명칭'을 근간으로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은 '성인이 된 어느 즈음에 사랑하는 사람과 법적으로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합의다. 그러나 이것이 '기준'이 되면서 사회적 압력이 발동한다. 


즉, '결혼'이라는 개념의 본질은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질문만이 난무한다.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

결혼할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혼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애매함'이란 '이것인지 저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란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되어 '애매하면 줏대가 없다'란 뜻으로 고착된다.


'애매한 자는 유죄'가 되는 것이다.


애매함이 장르


이러한 사회적 압력 때문인지, 우리는 무언가 애매할 때 뭔가 죄책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넌 되고 싶은 게, 하고 싶은 게 뭐니?'란 질문에 대답을 주저하면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는다. '대체, 나는 뭘 좋아하는 거지? 내가 할 줄 아는 건 뭐지?'란 생각에 잠을 설친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언가 명확한 대답을 찾느라 바쁘다.

위와 같은 질문에 '동사'가 아닌 '명사'로 대답하는 게 그 증거다. '무엇을 하고 싶다, 이루고 싶다'가 아니라, '의사'나 '변호사' 또는 '부자'나 '유튜버'가 되겠다고 즉답하는 것이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야 한다. 내 꿈을 '개념화된 명칭'에 욱여넣을 게 아니란 말이다.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무명 가수가 자신의 '애매함'이 걱정이라 말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닌고,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지도 못했으니 무언가 명확하지 못한 자신을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고백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수의 애매함이 곧 그의 장르라는 말을 전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장르'라는 말에 그의 퍼포먼스를 욱여넣지 못했던 심사위원들은 결국 그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인정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애매하다고 말한 그 가수는 그 오디션 프로에서 1등을 했다.

무명 가수가 유명 가수가 되었고, 자신만의 음반을 내게 되었으며, 원하던 무대의 기회를 얻었고, 1억이라는 상금도 받게 되었다. 


스스로 애매하다고 고해성사를 했던 그 가수가 말이다.


애매함이 필요한 시대


나는 '애매함'을 우려하는 그 이데올로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부정하는 건, 또 다른 이데올로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배고픔에서 벗어나 빨리빨리를 외쳤던 우리네에게 '애매함'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고픔이 해결되어 각자의 다양성과 개성이 만개하는 시대이므로 '애매함'은 미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획일화가 아닌 다양성의 시대.

나는 오히려 '애매함'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애매함'이란 개념을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라, 애매함의 시대적 특성을 받아들이고 또 뒤에 감춰진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애매함의 경계에 서있을 때, 더 이상 자책하지 않는다. 더불어, 더 창의적이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면서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고 있다.


지금 혹시라도 자신의 삶이 애매해 허덕이고 있다면, 잠시 몸에 힘을 빼고 그 애매함을 오롯이 즐겨 봤으면 한다.


첫째, 애매함은 '본질'이다.


삶은 궁극적으로 애매하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애매모호하다.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누구도 분명하게 우리네 삶과 인생을 정의할 수 없다.


즉, '애매함'은 본질이다.

삶은 애매함이라는 장르 그 자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애매함을 인정할 때 삶이 조금은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천하 모두가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됨을 아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선이 선이 됨을 아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이 서로 비교되며, 높고 낮음이 서로 기울고, 가락과 소리는 서로를 조화시키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라간다.

- 노자 '유무 상생', 도덕경 中 -

'유무'는 모순과 같이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부조리하지만, 그 속에 '그 둘은 상생하고 있다'라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유'가 없으면 '무'도 없다. 반대로 '무'가 없으면 '유'도 없다. '희비(嬉悲)'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으로 더 분명해지려고 할 때 삶은 왜곡되고 오염된다. 


중간이라는 애매함.

즉, '경계의 면'에 서있을 때 삶은 오히려 더 명확해진다. 삶은 애매함의 연속이라는 걸 인정할 때, 애매함 속에서 우리는 분명함과 선명함을 찾을 수 있다. 다시 애매해진다한들, 두려움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어차피 삶은 애매하다는 걸 알기에.


둘째, 애매함은 '휴식'이다.


우리 사회는 '극단'을 강요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 압력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르지 않으면 '회색분자'가 된다. 또는, 이것 골랐다 저것을 고르면 일관성이 없다고 매도된다.


그래서 '이것'을 고르면 나는 '저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나는 '좌파'나 '우파'가 아닌데, 조금이라도 어느 한쪽으로 기운 성향을 나타내 보이면 나는 말 그대로 어느 한쪽으로 '규정'되고 만다.


우리는 '선택'앞에 극도로 피로해진다.

'최선', '차선', '차악', '최악' 중 하나로 결정될 선택의 순간은 매우 조심스럽다. '최선'보다는 '최악'을 면하고자 하는 본능이 발동한다. '선택'과 함께 따라다니는 '후회'라는 감정을 많이 맛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 조급함 대신 애매함의 경계에서 다시 그 선택지를 바라보면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진다.

그 순간 애매함은 '최선'과 '최악'을 포용하는 '용기'가 되기 때문이다. '최선이 되어야지' 또는 '최악은 면해야지'란 양극단의 부담은 후회의 크기를 키울 뿐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오히려 애매함을 추구해야 한다. 

쉬어가야 한다. 잠시 애매해도 된다. 극단적인 선택 앞에 잠시 주저해도 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때론, 시간이 해결해줄 것들도 분명 있는 것이다. 


그림자를 앞서가려는 어리석음이, 오늘도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애매함'을 '휴식'으로 받아들이는 지혜와 함께.


셋째, 애매함은 '시작'이다.


무언가가 명확이 떠오르지 않는 그 순간.

그래서 삶이 칠흑과 같은 어둠에 둘러 싸여있다고 생각되는 그때. 삶은 고단하다. 남들은 명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어둠 속에서 허우적 대는 것 같다.


끝이 없는 터널에 갇힌 느낌.

그 고통과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희미한 빛은 더 밝게 빛난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도 있다. 애매함이라는 터널을 걷다 보면, 저기 저 멀리 작은 빛이 더 환하게 보일 때가 분명 있다. 


'애매함'은 이도 저도 규정되지 않은 어떤 상태다.

무언가를 선택하기 이전이고, 또 아직 정해지지 않은 길 앞에 있는 상태와 같다. 


돌아보면 모든 '시작'의 출발선은 '애매함'이다.

애매하다는 생각에 분명해지려 노력했고, 어느 한쪽으로 쏠리며 다시 애매함을 맛보게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과정을 거치며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나의 글쓰기는 삶의 애매함에 대한 허무로부터였다.

이도 저도 아닌 삶이 지긋지긋했고, 그 지긋지긋함들은 글이 되었다. 애매함을 시작으로 발판 삼아, 애매함을 글의 소재로 삼으니 인생에 없던 무언가가 시작된 것이다.


애매함을 받아들이니, 그 애매함들이 삶에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으로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애매한 내 삶을 저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한다. 애매한 삶은 불안정하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고르지 않다는 말이다. 


고르지 않은 높낮이가 물을 흐르게 한다.

고르지 않은 압력이 바람을 일으킨다.


고로, 고르지 않은 삶이 우리를 기어이 움직이게 만들고 오늘 하루를 살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 고르지 않음은 결국 애매함에서 온다는 걸 나는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에너지를 가지고 또 무엇을 해낼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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