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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1. 2021

글쓰기는 합리적인 열정이다.

'합리적인 열정'은 균형이 잡힌 상태다.

따뜻한 차가움,
차가운 따뜻함


많은 사람들이 '미지근함'을 얕본다.

뜨뜻미지근하다는 표현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쓰인다는 것이 그 증거다.

사람이 왜 그리 뜨뜻미지근해?

하루 중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의 기분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지근함'에는 '미학'이 숨어있다.

함부로 얕볼 게 아니다. <직장 내공>에서도 이미 이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출근 준비를 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던 어느 날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나는 샤워를 하며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의 중간을, 심혈을 기울여 조절하고 있었다. 미지근함을 지향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매일. 그러고 보니 미지근함은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의 조합이었다. 

'뜨거운 마음'과 '냉철한 이성'을 모두 갖고 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기. 
직장인으로서 내가 지향하는 모습이다. 
직장에선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상황, 별의별 유형의 사람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미지근함은 고도의 기술이다. 
이것을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부정적 어감의 미지근함과 구분하기 위해 '적극적 미지근함'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적극적 미지근함'과 '소극적 미지근함'의 차이는 자기 성찰과 의지에 달려있다. 자신의 평소 태도가 차가운지 뜨거운지를 알아차리고 이를 바탕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거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조절할 의지를 갖고 있어야 적극적 미지근함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다.

- [직장내공] '미지근함의 미학' 중 -


그러니까, '미지근함'은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차가움과 뜨거움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다.

뜨뜻미지근해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아니라, 냉정과 열정의 균형을 이루어 마침내 우리에게 기분 좋은 최적의 온도와 상태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열정?


'합리적인 열정'이란 말은 낯설다.

'합리'는 차가운 단어이고, '열정'은 뜨거움이 느껴지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그 둘은 상충한다. 그러나 '미지근함의 미학'으로 그 표현을 바라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그 문장 자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차가워야 할 때가 있고, 뜨거워야 할 때가 있다. 덕분에 우리는 36.5도라는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열정'은 타올라야 한다고 믿는 정서가 가득하다.

식어선 안된다. 모든 걸 태워 없애야 한다. 폭주해도 좋으니 열정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 잘 알 것이다. 모든 걸 태우고 나면 재로 남는다. 그것은 숙명이다. 슬럼프나 번아웃은 검게 타버린 우리 열정과 마음의 재다. 


식어버린 재는 초라하다.

그것을 뭉쳐 숯으로도 사용할 수 없다. 바람에 흩날리고, 여기저기에 버려질 뿐. 더 이상의 쓰임은 없다. 그런데, '열정'은 타올라야 한다는 맹신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그 재에 불을 붙이려는 어리석음을 내어 보이고 만다. 


살아나지 않을 재에 불을 붙이려는 시도는 잠시 내려놓고, 말 그대로 쿨다운을 해야 한다.

잠시 차가워진다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뜨거워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을 괴롭히고 또 괴롭힌다. 이렇게, 잠시 식어도 괜찮다는 시야와 다짐 그리고 다시 열정이라는 불을 붙이려면 식어버린 재가 아니라 다른 땔감을 가져와야 한다는 깨달음이 바로 '합리'다. 


'합리적인 열정'은 '균형'이다.
더불어, '균형'은 찰나다.


너무 과한 열정은 독이 된다.

반대로, 너무 과한 냉정도 독이다. 뜨거우면 화상을 입고, 차가우면 몸을 움츠린다. '미지근함의 미학'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미지근함'은 '합리'와 '균형' 모두를 뜻한다.

우리가 잘 아는 '중용' 또는 우리 몸 최적의 균형 상태를 말하는 '호메오스타시스(항상성)'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이젠, 긍정적으로 보지 못했던 '미지근함'이라는 표현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금은 변했거나 일종의 미안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열정에 취해 있을 때, 내 열정으로 다른 사람이 덴 건 아닌지 돌아볼 수 있는 배려.

한 없이 무기력할 때 뜨거움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동기. 그 둘이 모여 마침내 삶의 균형을 맞춰가게 된다.


그러나, '균형'은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사실, '균형'은 신의 농간일는지 모른다. 그것은 '찰나'이기 때문이다. 배고프지도 배부르지도 않은 상태, 행복한 마음이 드는 때, 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고요한 마음은 일정의 균형이 잡힌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말 그대로 '순간'이다.


더더군다나 그러한 순간들은 삶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합리적인 열정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 글쓰기


뜨거울 땐 내가 뜨거운 줄 모르고, 차가울 땐 차가운 줄 모른다.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한다. 메타인지를 할 때 비로소, 나의 온도를 눈치챈다. 과하게 뜨거운지, 과하게 식었는지를 알면 움직여야 하는 당위성이 생기고 무언가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한다. 즉, 균형 잡기에 나서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한쪽으로 쏠린 균형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

바로 '글쓰기'다. 


글을 써서 남긴 글에는 '나'라는 '자신'이 흥건하다.

내 속에서 나온 글을 본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기 객관화'의 시작이다. 생각과 마음은 꺼내어 볼 수 없으나, 그것들을 담은 내 글은 분명한 실체가 된다. 실체는 '증거'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증거이고,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꼈다는 표상이다.


막연하게 바라던 것들도, 글로 써 내려가면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이는 이미 수많은 실험에서 입증되었다. 나를 객관화하고, 내 상태를 이해하여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다 보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들도 이루어질 것이다. 결심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마침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힘은 '글쓰기'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글쓰기는 합리적인 열정'이다.

한 번 확 타오르는 일회성 열정이 되지 않도록, 불붙지 않는 재에 불을 붙이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글쓰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종용하고, 기어이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합리적인 열정'은 균형이 잡힌 상태를 말한다.

'균형'은 '찰나'라 말했다. 즉, '합리적인 열정'을 구사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균형이라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이상은 이루어지기 쉽지 않지만, '순간적'으로는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쪽으로 오가는 그것은 운동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를 잘 활용하면 우리는 하나 둘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된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흔들림.

흔들림으로 인한 에너지.


이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합리적인 열정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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