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단점은 치명적 장점이 된다.
글쓰기의 기쁨과 슬픔
글쓰기를 시작하여 내가 얻고 있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일정의 '구원'을 얻은 느낌이다. '구원'은 어느 면에서 '끝'이란 의미를 지닌다. 나는 삶에 있어 '끝'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므로, '글쓰기가 나의 구원이다'란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구원'을 운운하는 것은 그만큼 글쓰기의 선물과 영향이 내게 있어 크다는 뜻이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상승한 주가는 곤두박질 칠 수 박에 없다.
'없는 것'이 있어야 있을 수 있고, '있는 것'이 있어야 없을 수도 있는 '유무상생'의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지만, 반대로 시련과 아픔을 주기도 했다.
물론, 기쁨과 슬픔의 요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글쓰기의 치명적 단점들
이제껏 나는 글쓰기를 예찬하고 또 많은 사람의 글쓰기를 종용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삶은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글쓰기를 통한 기쁨도 과하면 취하게 된다. 취한 존재는 사리분별이 흐려진다. 흐려진 사리분별은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 그에 상응하는 시련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만다.
나는 그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취해 있을 땐 몰랐던 것에 톺아 보려는 것이다.
사람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착각을 안고 산다.
취한 자는 자신이 취한 줄을 모른다. 그러니 괜찮겠지 운전대를 잡거나, 내가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며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흩뿌리곤 한다.
글에 취했을 때.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오고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 나는 마치 무어라도 된 것 마냥 여기저기에 나의 일을 떠벌리고 다녔다. 필명을 따로 지은 게 무색할 만큼 나는 나의 정체를 말 그대로 까발렸다.
글을 쓰게 되면 사람은 결이 달라진다.
문제는, 전업 작가라면 그 결의 달라짐이 환영할 만한 일이겠으나 본업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나는 직장인이므로 그 페르소나는 공동의 목표와 회사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인 잠시 접어두고 앞만 보고 달리는데 최적화되어 있어야 한다.
회사라는 조직과 주위 상사 그리고 동료들은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귀신같이 감지해낸다.
마치 순결하고 고결한 물질에 불순물이 들어온 것처럼. 심지어 나는 '결이 달라졌다'라고 스스로 떠벌리고 다녔으니 그 여파는 오죽했을까. 되돌아오는 화살을 반성하며 받아들이는 이유다.
글쓰기에 푹 빠졌을 경우.
나의 결이 달라졌음을 인지해야 한다. 본업이 있다면, 그 가운데에서 혹시라도 내가 결이 달라진 건 아닌지 자신을 살피고 추슬러야 한다. 글쓰기를 통해 결이 바뀐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본업의 결과 달라질 때, 나에겐 좋은 변화이지만 주변에는 그렇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변화된 결을 감추는 기술이 필요하다.
글을 쓴다면 주위에 떠벌리지 말 것, 바뀐 결을 굳이 드러내지 말 것, 내 결이 바뀌었음을 인지하여 본업에서는 본업의 페르소나에 집중할 것, 본업과 작가의 페르소나는 선명하게 구분할 것. 이것들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이제야 나는, 내 결이 달라졌음을 인정하게 되었고 비로소 본업과 작가의 페르소나를 뒤섞지 아니하고 구분하여 자유자재로 바꿔 끼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를 '글내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글 한 번 써본 적 없고, 일기조차 쓰지 않던 사람이 글쓰기에 푹 빠진 작금의 상황을 매우 합리적으로 표현해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는 그 창작의 고통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고, 글을 쓰고 싶어 손 끝이 간질거리는 '손맛'의 경이로움은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없던 창작과 표현의 세포가 생겨나면서 말 그대로 온 감각이 깨어나고 열리게 된다. 조금 더 과장해서 표현하면, 마치 영혼이 새로 태어난 느낌이고 그 영혼은 새살과도 같아서 모든 자극들을 예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흡수해버린다. 일상은 물론 내 주위 모든 것들이 글의 소재가 되는 이유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감각이 열리니 나는 민감하고 예민해진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기어이 보게 되고,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을 느껴버리며,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게 되고,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배려하려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다. 사회는 너와 나의 밥그릇이 부딪치는 전쟁터다. 아름답게 포장하려 해도, 그 '약육강식'과 '아생연후(나 먼저 살고 보자)'의 본질은 거역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회적 부대낌에서 '순박함'과 '순진함'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온 감각이 열리면 사람은 순진해지고 순박해진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기와 같은 마음으로의 회귀랄까.
글을 쓰기 시작하고 온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작가'라는 페르소나에겐 축복이지만, '사회인'이라는 페르소나에겐 곤욕이 아닐 수 없다.
글쓰기 초반에는, 글쓰기의 즐거움에 취해있었으므로 글을 쓰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불끈 솟은 기억이 가득하다. 그러나 글쓰기를 거듭할수록 나는 나를 깊게 들여다보았고, 그 안의 것들에 휘말리며 나 자신을 조금씩은 더 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기 위해', '나를 치유하고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나를 안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리 유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게 '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해야 한다. 내가 생각했던 '나'는 기대와 다를 수 있고, 부족한 점이 많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후의 글쓰기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글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하는 개념이 아니라, 겉도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다 보니 나를 더 깊이 봐야 하고, 읽는 분들보다 더 깊게 사색해야 하며, 글쓰기를 할 때 이전의 나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생각, 마음, 감정, 사색, 노력 그리고 물리적 시간까지. 그 에너지의 양이 정말 상당하다.
그나마 글쓰기가 일상화가 되면서, 이 에너지 소모를 일상 루틴의 힘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난다. 한 자리에 앉아 글 하나를 뚝딱 쓰는 게 아니라, 일상의 흐름에 걸쳐 글쓰기를 위한 에너지를 요령 있게 나누어 소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바로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는 비결이자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니, 글쓰기를 시작한 후 힘든 시간이 찾아오면 스스로를 다그치지 말고 글쓰기가 참으로 즐겁지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인정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앞서 말한 대로, 삶은 균형 잡기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삶은 피곤해진다.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거나 균형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반대로, 균형을 지향하며 살면 나쁜 게 나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중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 양극단을 오가야 운동에너지가 생긴다. '높고 낮음', 빛과 어둠', '양과 음', '유와 무' 그리고 '기쁨과 슬픔'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우리 삶을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고 나면 삶은 한결 덜 부담스러워진다.
그러니까, 글쓰기의 장점은 단점이 되고.
치명적 단점은 치명적 장점이 된다.
삶의 새로운 결이라는 축복, 온 감각이 열리는 환희, 의미 있는 생산을 위한 에너지 소비는 단점 뒤에 꼭 붙어 숨어 있는 장점들이다.
이 양극단을 오가야 비로소 글쓰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꾸준함이 확보되고, 내 부족함과 넘쳐남을 오롯이 느끼며 쓸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글쓰기가 그린 큰 그림일는지 모른다.
그렇게 웃다가 울어야, 울다가 웃어야 글의 소재가 나온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그래서 나는 쓴다.
등 떠밀려 쓰고, 내가 먼저 쓰고.
글쓰기의 장점과 단점을 오가며.
그렇게, 그저 쓰고 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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