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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해내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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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30. 2021

[Part 1.]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내가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다.

길을 잃은 느낌


이도 저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방황한다. 말 그대로 길을 잃은 느낌이다. 길을 잃었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가야 할 곳이 있으나 방향을 모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아예 모르는 경우다. 전자는 목적은 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와 같고, 후자는 목적 자체가 없는 것과 같다.


나는 이제야 삶은 '어떻게'가 아닌 '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남들이 달렸기 때문에 달려왔던 삶이었다. 왜 대학을 가야 하는지, 왜 좋은 직장에 가야 하는지, 왜 승진을 하고 더 많은 월급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 따위는 없었다. 그럴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나를 앞서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라도 따라가려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어떻게'애 매몰되었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더 나은 평가를 받는 법. 한 푼이라도 더 빨리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만 파고 또 판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살고 있는지를 돌이켰다.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인지, 남들이 하는 것을 왜 이리도 처절하게 따라 하고 있는지를 물었고 하나하나 글로 써 내려갔다. 그렇게 나는 '어떻게'의 구덩이에서 벗어 나와 '왜'를 묻기 시작했고, 이제는 내가 왜 이토록 열심히 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유를 알고 뛰니 조금은 덜 힘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여전하다.

'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목적'이 분명한지는 삶을 통해 증명해내야 하고, '목적'이 분명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목표'의 단계에서 나는 자주 좌절하기 때문이다.


'하위 욕구'에 흔들리는 '상위 욕구'


'목적'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으나, '목표'에서의 좌절은 사람을 나약하게 한다.

그 나약함이 크게 도지면, '목적'자체도 흔들리는 위험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를 통해 선하고 강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을 살자는 목적이 어엿하게 세워졌지만,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나는 자주 넘어진다. 넘어지는 이유는 대개 의지박약이나 게으름으로 인한 것들이다. 나는 더 많은 글을 써내야 하고, 더 많은 일들을 이루어내야 하는데 마음만 조급해진다. 조급해진 마음은 '포기'라는 가장 쉬운 방어기제를 만들어내고, 오늘의 일은 전지전능한 내일의 나에게 미룬다. 오늘 이루지 못했다는 속상한 마음에 폭식을 하거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다른 콘텐츠를 소비함으로써 나를 달랜다. 

그러나, 그 끝은 결국 자괴감으로 귀결된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나는 왜 그저 본능에 충실해지는 것일까?


여기서의 본능은 '욕구'를 말한다.

'욕구' 자체가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건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 또한 나의 '욕구'라는 것이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내 욕구는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적을 잘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유튜브를 보거나 평소에 하지 않았던 책상 정리와 같은 다른 '욕구'를 추구한다. 전자는 '상위 욕구'다. 반면, 후자는 '하위 욕구'라 말할 수 있다. 이 둘의 충돌은 항상 일어나는데 지난 삶의 경험을 돌아보면 승률이 높은 쪽은 '하위 욕구'인 경우가 많다.


'하위 욕구'의 승률이 높은 이유는 '하위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욕구불만의 회피'로 이것은 설명할 수 있다. 시험공부를 해 100점을 맞아야 한다는, 그러니까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상위 욕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쉬운 욕구(하위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먹고, 자고, 유튜브나 유머 게시판을 보는 건 너무나도 쉽다.


때문에, '하위 욕구'는 '상위 욕구'를 무참히 흔들어 놓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다.


프로이트의 자아 이론도 이를 뒷받침한다.

본능에 충실한 '이드'와 이상을 꿈꾸는 '슈퍼 에고'는 언제나 투닥거린다. '이드'가 '하위 욕구'라면 '슈퍼 에고'는 '상위 욕구'다. 그 사이에 있는 우리(자아)는 고달프다. 앞서 말했듯 승률은 '이드'가 더 높다. 나이를 불문하고 '자아'가 흔들리는 이유다.


'이드'는 쉬운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자동차의 오토파일럿과 같다. 알아서 다해준다. 자율주행 5단계가 되면 운전자는 무엇을 할까? 예상하기 쉽다. 아마 '하위 욕구'에 골몰할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현 자율주행 수준에서도 사람들은 운전을 차에 맡긴 채 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본다.


반면, '슈퍼 에고' 즉, '상위 욕구'는 우리를 언제나 불편한 곳으로 안내한다.

오토파일럿을 끄고 직접 운전하라고 말한다. 직접 운전하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가다 서다 막히는 길, 몰상식한 운전자를 만나는 일, 졸리고 배고픈 하위 욕구를 참아내는 일. 무엇하나 쉬운 게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운전대를 잡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핸들을 잡을 때 비로소 하위 욕구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쉬운 길로 들어설 것이 분명하다.


승률은 '하위 욕구'가 월등히 높지만, 그래도 내가 지나온 삶에서 무언가를 해내고 이루었던 때는 '상위 욕구'로 가는 길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한 때였다.

핸들에 손을 올리고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을 때. 시간과 정성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보단 저기 더 멀리에 있는 욕구를 떠올릴 때. 하나 둘,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확실히, 내가 원하는 것들은 언제나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내가 된다!


결국,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내가 된다.

내 '욕구'가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욕구'들은 '하위 욕구'인지, '상위 욕구'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구분했다면 그 둘 사이의 갈등을 중재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상위 욕구'가 이기게 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오만이다. 사람은 쉬운 본능을 억제할 수 없다. 쉬운 본능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한다. 그래야 생각도 할 수 있고 고상한 행동도 할 수 있으며,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는 '나는 내 주위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내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 마라. 가치 있는 무언가가 뒤기 위해 노력하라'라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의 말을 돌이켜볼 때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고민하게 된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잘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택한 결과들이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더불어, 내가 선택한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들인지를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이도 저도 하기 싫을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를 때.


'상위 욕구'와 '하위 욕구'의 중간에서 나는 보다 가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가치 있는 선택'이 바로 '해내는 힘'이자 자기실현의 방향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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