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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24. 2021

착한 직장인은 없다.

착하진 않아도 되니, 적어도 나쁜 직장인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어느 도시.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던 한 노인이 스테이크를 잘못 삼켜 기도폐쇄로 호흡 곤란이 왔다. 한 여성이 다가와 응급조치를 했고, 그 노인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성은 학교에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아직 전문적인 의술을 실제 환자에게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 법대생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인용하여 그 여성의 징계를 무마했다.

- 2000년 초에 방영했던 한 드라마 에피소드 -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잘 알려졌듯, 신약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동하다 강도를 만나 곤경에 처했다. 제사장, 레위인은 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만 유대인에게 멸시당했던 한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을 구제한다.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도덕적 차원에서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이 이야기에 근거하여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구조 불이행을 선택한 사람을 처벌하는 법규다. '구조거부 죄' 또는 '불 구조 죄'라고도 불리고,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쟁점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언제나 그렇듯 '직장인'을 떠올렸다.

착한 직장인은 있을까?
직장에서 어려움을 만난 사람을 나는 자신 있게 도울 수 있을까?


아마, 주변의 친한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내 질문에 반문할 사람도 몇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노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어느 한 조건을 좀 더 명확히 해본다면 어떨까.

어느 누구를 도왔을 때, 내 승진이나 퇴사에 영향을 받게 된다면? 사람들의 인정을 잃게 되거나 월급이 줄어드는 일이라면? 아마도, 누군가를 흔쾌히 돕는다거나 나서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를 나서서 도왔을 때.

또는 옹호하고 같은 편을 들어 목소리를 내었을 때. 그 결과가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당장의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서운 법이다.


나비효과가 되어 태풍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그저 작은 나비의 날갯짓으로 끝날 수 있으나 풍전등화와 같은 직장인의 삶은 과감함을 잃은 지 오래다.


나는 거듭 말한다.

직장인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이 밥그릇과 저 밥그릇의 만남이라고. 이것이 내가 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깨달은 단순한 진리다. 즉, 겉으론 친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를 대신하여 퇴사하거나 승진을 양보할 일은 절대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내 밥그릇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앞의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돌아가.

우리는 '착하다'란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한다. 남을 도와주는 것이, 그것도 손해를 보고 내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돕는 것이 무조건 착한 것은 아니다. 내게 피해가 없더라도, 누군가를 돕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여력이 있어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지탄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그와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우려하고 반대하는 건 누군가를 돕고 안 돕고를 떠나 남의 밥그릇을 짓밟거나 악의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그 행태다. 

돕고 안 돕고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으나, 누군가를 해하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한, 그러니까 생존을 해야 하는 한.


착한 직장인은 없다. 


마냥 착해서도 안된다. 

착하다는 정의와 기준도 다시 세워야 한다. 직장은 '착하다'란 말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착한 직장인을 기대하지 말거니와 착한 직장인이 되자고 마음먹을 필요도 없다.

그저 내 일을 묵묵히 하면 된다. KPI(Key Performance Index)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 누군가와 갈등을 겪는다 하여, 내가 착하지 않거나 상대방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직장은 그렇게 돌아가는 곳이다.


단, 착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진 말아야 한다.

그것은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를 떠나 인간 본연의 성질에 달린 각자의 몫이다.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근거하여 '착한 직장인 법'이 생긴다면.

각자의 밥그릇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생기는 갈등에 적용되기보단, 인간 본연의 배려와 존중감을 위배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해치는 이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직장에선 돕지 못할 상황이면 돕지 못하거나, 돕지 않는 게 옳다.

누군가의 밥그릇을 걷어 차려하거나, 누군가를 해하려 하는 그것이 더 잘못이다.


착하진 않아도 된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나쁜 직장인은 되지 말자고 다짐하는 그것 하나로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서 우리네 지장인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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