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놈'과 '안될 놈'엔 경계가 없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 노자 -
요즘 들어 강을 많이 바라본다.
아니, 직장생활 내내 나는 강물을 바라봐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말처럼 고요히 앉아 있진 못했다. 씩씩대는 얼굴과 흥분된 마음으로 바라봐서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원하는 건 내려오지 않는다.
더 약 오른 건, 강물에서 만나기를 바랐던 사람이 승승장구할 때다.
분명 나는 저 사람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는데, 정의가 살아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 강물에 떠내려오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저렇게 잘 나가는 건 또 뭘까.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힘이 없다.
오히려 기다리지 않았으나 떠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잘해줬던 사람, 좋은 이야기를 해줬던 사람. 저 사람이 올라가야 세상이 변할 거라 기대했던 사람.
왜 직장에선 될 놈은 안되고, 안될 놈은 되는 걸까?
회사만큼 이상한 나라가 이 우주에 또 있을까?
'될 놈'은 누구고,
'안될 놈'은 누구인가?
직장에선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들이 별의별인 게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자체가 사람들을 별의별인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직장생활을 통해 이상해지는 사람이 많다.
이는 너와 나의 밥그릇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내 밥그릇과 너의 밥그릇의 만남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에 위협이 가해질 땐 누구든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이상해져야 한다. 그래야 미친 세상을 이성적으로 살아낼 수 있다.
문제는 덜 이상한 사람이 받는 상처다.
이상해 지려 노력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순수하다거나 순진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필요 이상으로 이상해진적도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정상적인적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엔 누군가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엔 내가 받는 상처가 더 많았을 것이다.
큰 상처를 받았을 때 나는 노자의 강물을 떠올린다.
반대로, 누군가는 강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안될 놈'은 강물에서 만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될 놈'은 강물에서 만나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 '안될 놈'은 나에게 상처를 많이 준 사람. 이상한 사람. 없었으면 좋겠는 존재다.
'될 놈'은 나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 이상하지 않은 사람. 항상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다.
'될 놈'과 '안될 놈'엔 경계가 없다.
그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직장생활을 이어오면서.
나는 '될 놈'과 '안될 놈'의 경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을 경험해야 하고, 싫어했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도움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그렇게 '될 놈'이 '안될 놈'이 되고 반대로 '안될 놈'이 '될 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다. '상수'는 내 밥그릇이다. 그에 따라 더 이상해지고 덜 이상해지고는 '변수'가 된다. 그러니, 나도 너도 때에 따라 원수가 되기도 또는 동료가 되기도 한다.
물론, 현실은 좀 더 차갑다.
원수가 친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친구가 원수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준은 늘 흔들린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바람 때문일까?
아니다. 흔들리는 건 내 마음이다.
그렇다면, '될 놈'과 '안될 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거나 부대끼는 상황은 누구 때문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저마다의 밥그릇 앞에, 저마다의 먹고사니즘에, 저마다의 생존 앞에 비굴해지고 이상해지고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자의 본능이자 특권이다. 살아 있다면, 살아가기 위해서 응당 그래야 한다. 그러니 누구를 두고 이상하다느니, 괴송하다느니 왈가왈부하는 건 모두의 오만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싫어하는 사람이 안되길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잘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이 안되길 바라고 좋아하는 사람만 주위에 있길 바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괴로워지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상한 나라에선 나도 이상해져야 한다.
이상한 나라에선 이상한 게 정상이다.
단, '이상함'의 목적은 내가 살아남기 위함이지 남을 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남을 해하는 이상함의 소유자라면, 강물을 바라보며 그가 떠내려오기를 기다려도 좋다. 반대로, 나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더불어, 나는 누군가 떠내려오기를 바라기보단 그저 내 마음을 돌보자고 마음먹는다.
무언가가, 누군가가 떠내려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바라봐주는 게 더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이상한 나라에서 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가장 필요한 능력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노자가 말한 격언의 진실을 아래와 같이 읊조린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네 그 소란한 마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것이 떠내려 오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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