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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28. 2021

닭의 목을 비틀어도 주말은 온다.

직장인의 행복하지 않은 마음은 주중의 나와 주말의 나를 구분할 때 온다.

전쟁터와 직장,
그 공통점과 차이점


흔히들 직장을 전쟁터와 비유한다.

보이지 않는 포탄과 들리지 않는 총성. 나는 그 비유에 흔쾌히 동의한다. 그 동의의 기저는 '생존'이라는 단어에 기인한다.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어 몸을 움직이고 난도질당하는 마음과 영혼을 추슬러야 하는 게 서로 그리 닮았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지만, 생존의 범주에서 본다면 전쟁터는, 직장이든, 회사 밖이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건 매 한 가지다.


그러나 나는 직장이 전쟁터 또는 회사 밖과 아주 크게 다른 한 가지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건 바로 '주말'이다. 전쟁터엔 주말이 없다. 회사 밖에도 주말은 없다. 매 순간을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 걸음라도 뒤처지지 않도록. 마치 타르를 발라 놓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처럼 한시라도 쉬지 않고,  없이 오르고 올라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말은 직장인에겐 축복과도 같다.

주말은 공식적인 휴식이며, 이제는 시대가 많이 변하여 주말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상사이상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주말에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도 있을 테고 여전히 주말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것은 주중과 주말이 구분되어 받아들여진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다 보니, 직장인은 어느새 주말만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별주부전 속 토끼처럼, 주중엔 영혼을 집에 두고 출근하고 껍데기로 출근하여 이래저래 지내다 금요일 밤에 영혼을 도로 되찾아 머금는. 금요일 오후부터는 그야말로 생기가 흐르고, 주말에 무얼 할까 기대에 찬 그 기분의 고도는 우주에 닿을 정도다.


그러나 기 기분도 잠시.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뭘 하지도 않았는데 월요일이 등 뒤에 와있다. 그 기운에 떠밀려 마음은 착잡해지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과도 같다.


이러한 생활의 반복은 직장인의 숙명이다.

동시에, 이 숙명이 직장인을 지치게 하고 무디게 하고 번아웃과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말을 온전히 쉬는 방법


나 또한 직장생활을 하며 이 숙명의 범주안에 있다.

때론 주말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주말의 허무함에 사무치며 슬럼프를 겪기도 한다. 산을 오르거나 오래 걸어야 할 때, 오히려 잠시 쉬어 더 힘들 때가 있다. 다시 일어나 걸을 때 욱신욱신한 근육통은 더 크게 올라오고, 온몸은 물 먹은 스펀지처럼 천근만근이다.


그렇다면, 주말을 좀 더 온전히 쉬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쉬어야 허무하지 않게, 직장인으로서의 회의감이 들지 않게 매주 쉼표를 찍을 수 있을까?


한 신문에 '월요병을 물리치는 Tip'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 Tip은 일요일에 월요일에 할 업무를 미리 시작하라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아티클에 온갖 분노를 쏟아부었다. 사실, 내가 이 Tip을 본 것도 언론 매체가 아니라 유머 게시판이었다. 기가 차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수준의 대답.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나는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직장인은 주말을 온전히 쉴 수 없다.

주말은 짧고 월요일은 분명히 올 것이기 때문이다. '쉼표'는 진행형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개념이다. 즉, 쉼은 눌러앉는 게 아니라,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잠시 잠깐의 멈춤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말을 '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중의 날들이 그만큼 힘들어서일 것이다. 모든 걸 놓아버린 주말은 그렇게 '끝'으로 인식이 되니, 일요일 저녁에 다시 일어서기가 그리도 힘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니, 일요일 저녁에 월요일에 할 일들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업무까진 하지 않더라도,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메모로라도 적어보는 것이다.


그러자,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적잖이 도움이 된다는 걸, 나는 몸소 경험하고 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주말은 온다.
주중의 나와 주말의 나를 구분하지 말 것!


또 하나.

삶의 역설을 잘 활용하면 된다. 주말에 잘 쉴 수 있는 방법은, 주중에 온 힘을 다하여 일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본다면. 몸이 편하면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 잠을 잘 자는 법, 숙명을 취하는 법, 일찍 잠자리에 드는 법을 아무리 연구해도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낮에 운동을 하거나 무언가에 골몰하여 하루를 잘 마무리하면 행복한 피곤감과 함께 머리를 대자마자 우리는 잠들 수 있다.

즉, 잘 쉬는 방법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쉬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온 힘을 다해 보는 것이다. 사실, 직장인의 행복하지 않은 마음은 주중의 나와 주말의 나를 구분할 때 온다. 만족할 수 없는 월급과,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욕구불만은 스스로의 영혼을 분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내 영혼과 진심을 잘 챙겨야 한다. 주중의 나도 ''이고, 주말의 나도 ''이다. 즉, 지금 내 페르소나가 직장인이라면 그것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본업이 온전히 돌아가고, 이 본업이 온전히 돌아가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여력도 생긴다.


무엇보다, 직장인으로서 덜 불행할 수 있다.


더불어, 직장인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 하나.

바로 이 반복의 숙명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언젠가 회사는 더 다니고 싶어도 그러하지 못할 때가 온다. 어벤저스에 나오는 도르마무가 걸린 저주와 같은 타임루프 또는 시시포스가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저주를 직장인의 삶에 대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한'과 '유한'의 차이. 이 둘의 차이라면 직장생활과 그것들은 비교할 대상의 무엇이 아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주말은 온다.

내가 거부해도 온다. 주말은 알아서 오고, 알아서 갈 테니. 그것에 집착하기보단 내 주중의 삶이 어떠한지, 그래서 내 주말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내가 나를 부정할 때 행복감은 저하된다.

물론, 지금의 나 자신을 인정한다고 행복함이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복의 출발점에 설 순 있다. 내가 나를 부정한다면, 그 부정당한 존재는 행복도 슬픔도 느낄 수 없다. 내가 나를 인정하는 순간, 나는 행복할 권리도 있고 슬퍼할 자격도 주어진다.


직장인이란 페르소나는 내 가장 무겁고 두꺼운 페르소나다.

나중에 다른 어떤 일을 할지언정, 지금 내가 직장인이라면 주중과 주말을 구분하지 않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하든, 다른 곳에서 일을 하든. 지금 우리가 연습해야 하는 건 온전한 자아로서 일을 맞이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월요일은 온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주말은 온다.


어차피 올 날들이다.

그날들을 구분하여 나를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중의 내가 나에 대한 책임감으로 온전히 일한다면, 주말의 나도 아주 잘 쉴 수 있다.


그 둘은 다르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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