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Sep 30. 2021

(월급에 포함되어 있는) 일의 종류

일과 월급의 가치는 내가 올릴 수 있다!

이 월급에, 이런 일까지 해야 해?


한 대선 후보가 대학생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 말해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첨단과학과 컴퓨터, 기술 역량을 강조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아'다르고 '어'다른 우리네 정서에 비추어본다면 이것은 분명 육체노동에 대한 비하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자본의 성장률이 노동 급여의 성장률을 앞서고 있는 이 시대에 누구나 민감해 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발언이라는 생각이다. 한 부모가 그의 아이에게 (육체노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저렇게 안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마냥 그를 비판할 수가 없다.

나 또한 무심코 그와 같은 결의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때였다.

회사 제품 샘플을 옮긴 적이 있는데, 그 제품의 무게는 무려 150kg이 넘는 것이었다. 당시 (오래전이니까..)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던 나는 땀범벅이 되었다.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 때문에 열기는 옷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짜증이 몰려왔다.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 월급에.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해?"


월급엔 모든 일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것까지!


'이런 일'이란 뭘까?

사무직이라 생각했던 내가 몸을 썼기에 떠오른 말. 비하의 의도는 없지만, 나는 분명 앞서 말한 대선 후보와 그 결이 다르지 않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이후, 나는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월급 안에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일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그 어떤 것도 육체와 연관되지 않은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사무직이라 대개 '머리'를 쓴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우리는 '머리'또한 육체라는 걸 간과하고 만다. 야근은 온몸으로 하는 육체노동이며, 사무실 안에서도 무언가를 옮기거나 땀을 흘려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일들이 분명 있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하는 '일'의 종류엔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직장에서 해왔던, 하고 있는, 해야 할 일을 돌아보기로 했다.


분명한 건, 이 모든 건 이미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월급의 정도와 금액에 상관없이 말이다.


1. 단순 업무


반복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이 분명 있다. 예를 들어 엑셀 데이터 정리나, 서류 분류 등의 일이 그것이다.


2. 보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중요하고도 짜증이 나는 일이다. 너무 많은 보고로 직장인들은 오늘도 허덕이며 야근을 한다. 구두보고, 서면보고, 대면보고, 약식보고, 중간보고, 긴급보고, 메모보고 등. 그 종류도 가지가지다.


3. 책임지는 일


직장에선 내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회사의 시스템은 책임의 주체를 확실히 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메일은 내 발언의 증빙이며, 품의서와 시스템은 내 이름과 행적을 고스란히 담아 두는 저장고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책임의 주체와 정도를 가늠하기 위한 것들이다.


4. 예상하는 일


시장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내게 될지. 예상하고 또 예상해야 한다. 직장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는 존재다. 과거 실적과 현재의 예상, 그리고 미래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예상을 잘해야 한다. 내 삶의 한 치 앞은 알 수 없어도, 일과 관련된 예상은 잘 해내야 한다.


5. 갈등을 겪는 일


회사는 참 잔인한 존재다. 각 조직과 각 개인에게 서로 다른 목표와 KPI(Key Performance Index)를 준다. 한 마디로 서로 싸워 결과를 만들어 내란 이야기다. 정반합의 논리. 실제로 직장은 그렇게 굴러간다. 갈등을 통해 서로 성장하기도 하고, 서로 마음의 상처를 얻기도 한다. 같은 월급쟁이들끼리 왜 이리 서로 지지고 볶나를 회의했었는데, 결국 같은 월급쟁이들이라서 그런 것이란 걸 깨달았다. 갈등도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 분명.


6. 협의하는 일


협의 과정과 단계도 월급에 포함되어 있는 일이다. 갈등과 한 세트라고 봐도 좋다. 협의와 갈등을 통해 각 부서는 서로 돕고 싸우며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 두 가지는 꼭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니 잘 익혀두면 좋다.


7. 주도하는 일


직장은 '자기 효용성'을 잘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인정받던 학생들이, 직장에선 매일 혼나고 지적받으며 쭈글 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때론,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일에 대한 성취감이 들 때가 있다. 이때 '자기 효용성'은 수직 상승한다. 이런 건 내가 돈을 주고라도 얻고 싶은 것이다.


8. 회신


직장인 대부분의 일은 '회신'이다. 회신하지 않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회신을 요청한다. 회신을 잘해야 한다. 그래야 일 잘하는 사람이 된다. 속도와 내용 모두 중요하다. 때론, 회신해야 한다는 압박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지만, 월급에 포함된 일이니. 그리고 내 역량을 알리는 일이니 묵묵히 그리고 신속하게 회신하는 걸 권한다.


9. 분위기를 만드는 일


분위기를 잘 만들어야 하는 것도 일이다.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을 거라면 깨지는 말아야 한다. 때로는 노래방 테이블 위에 오르기도 해야 한다. 상사 또는 바이어 앞에서 분위기를 잘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일인가 싶은 회의감도 든다. 바이어 앞에서 노래방 테이블 위에 올라가 강남 스타일을 부를 때, 잠시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결국 바이어를 즐겁게 해 주어 성과가 나면 그것은 내 것이란 걸 인정하고 더 신나게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일 모두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 (성과가 잘 나 보너스가 오는 경우도 물론 있고.)


10. 잔심부름


라떼를 말하자면, 입사했던 20여 년 전을 돌아보면 담배나 선배들의 사적인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그럴 일이 거의 없다. 시대가 변하기도 했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상당히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수평적 구조가 잘 자리 잡고 있다는 건 환영할만하다. 그럼에도 프린트라든가 기타 잔심부름은 있을 수 있다. 투덜대기보단, 월급에 포함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행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11. 의전


'의전'은 '정해진 격식에 따르는 행사'라는 뜻이다. '회사 상사나, 바이어들을 모시는 일'로도 통한다. 직장 생활에서 이만큼 피곤하고 부담되는 일도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간, 동선, 음식, 분위기. 심지어는 (농담으로) 날씨까지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진짜 업무(?)를 해야 하는 시간에 이러한 예행연습을 몇 번이고 하다 보면, 내가 여행사 직원일까... 란 착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걸 잘 배워 놓으면 다른 곳에서도 잘 써먹을 수 있으니 구시렁대기보단 하나하나 잘 배워두면 좋다. (집안 내 어르신을 모시거나,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또는 가족 행사 등의 기획과 실행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12. 기분을 살피는 일


보고 전에 앞선 시간에 보고한 사람들에게 묻는다. "오늘 사장님 기분이 좀 어때요?". 의사결정을 기분으로 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상사와 주변 사람들의 '기분'은 참 중요한 변수이자 체크 포인트다. 간혹, 남의 기분을 살피는 게 뭐랄까... 자존심 상하거나 비굴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나를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특히, 심리학을 전공한 나는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걸 즐긴다. 그 상태를 파악하여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데 활용하면 도움이 되는 때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연습을 하다 보면 유용한 '센스'가 탑재될 것이란 걸 믿길 바란다.


13. 조마조마함


직장인은 언제나 조마조마하다. 한 치 앞을 바라보기 힘들고, 내가 행한 일이 어떤 결과를 나타낼지. 이번 달 마감은 잘 될지.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지 언제나 걱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승진이나 업무 평가에 대한 불안과 초조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게 직장인이다. 조마조마함도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14. 승진 또는 누락


직장인에게 월급과 승진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모두가 저 산 위에 있는 깃발을 잡으로 떼려 달려가는 곳이 바로 직장이다. 그러니 승진과 누락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승진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누락했다고 자괴감을 갖지 않는 것.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러해야 한다.


15. 욕먹는 일


욕은 두 가지로 나뉜다. '쌍욕'과 '질책'이다. 요즘은 쌍욕 하는 일은 많이 줄고 있다. 그러해선 안 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다 보니 이젠 돌려 까거나, 은근히 스트레스를 주는 발언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욕을 먹는 건 직장인의 일 중 하나다. 기분 나빠하지만 말고, 그 욕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어, 내가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좋다. 그렇다면 월급의 가치는 더 올라갈 것이다.


16. 출근, 퇴근하는 일


직장인에게 있어 '퇴근'은 그날 하루의 트로피를 받는 것과 다름없다. 퇴근한다는 것은 출근을 해냈다는 것이며, 묵묵히 욕먹으면서도 제 자리를 지켰고, 상사의 욕을 먹고 뛰쳐나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니까. 사람들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게 직장인이라지만, 사실 꼬박꼬박 한 건 월급이 아니다. 바로 '나'가 꼬박꼬박 한 것. 거르지 않고 출근과 퇴근을 했으니 나오는 게 월급이지 않은가.




이 밖에도, 내가 열거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

나는 내 회사와 직장이라는 곳이 고마울 때가 많다. 출근하는 것도 힘들고, 욕먹는 건 유쾌하지 않고, 사람들과 갈등해야 한다는 게 부담이지만. 이 모든 걸 '돈을 받고 배우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고마움이 배가 된다.


나는 분명 어느 시점에 직장을 그만둘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직장에서 배운 '일'로, 의미를 찾아낸 '업'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돈을 받으며 배우고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니다. 아니,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는 그것에 대한 확신이 더 짙어진다.


다만, 직장은 학교가 아니므로 마냥 배우는 게 아니라 성과로 기여를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고, 성과는 개인과 직장이 나누어 서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 월급에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고 푸념하기보단, 내 일을 잘 구분하고 그 모든 게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일의 의미를 하나라도 더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나를 관통하는 일하기이자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