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느끼는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자 '원형'이다.
'노멀 피플(Normal People)'
'노멀 피플'이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다.
동명의 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인데, 10대를 지나 20대에까지 이르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마음 변화를 담고 있다. 고등학교 때에는 남자가 소위 말하는 핵인싸이고, 여자는 아웃사이더다. 남자 주인공은 인성도 착하고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한다. 반면, 여자 주인공은 유별난 말과 자신의 고집을 그대로 행동으로 내보이며 주변의 소외를 받는다.
그런데, 둘이 같은 대학을 가며 상황은 급 반전된다.
대도시에서 남자는 적응을 하지 못해 친구 하나 없고,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던 여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핵인싸가 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 둘의 사랑은 자꾸만 엇갈리고 또 엇갈린다. 사랑인지, 미움인지, 고통인지, 기쁨인지를 모를 그 혼돈을 감독과 배우들은 섬세하게 잘 표현해냈다.
여기에서 난 아주 흥미롭고도 중요한 요소 하나를 찾아냈다.
그들에 대한 주위의 평가와 반응이 달라졌을 뿐, 그들 자신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내가 아닌 사람을 연기해야 하는 곳'
그러니까,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그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이고, 좋아하는 운동에 열정을 쏟은 것뿐이다.
착하고 성적이 좋고 운동까지 잘하니, 사람들의 관념이 모여 이루어진 이데올로기는 그를 '핵인싸'로 만든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남자 주인공의 '페르소나'가 된다. 페르소나의 특성이 그렇듯, 내가 원하지 않아도 쓰게 된다. 여자 주인공 또한 원하지 않는 '따돌림당하는 학생'의 가면을 쓰게 된다. 상반된 사회적 가면이지만, 그 둘의 마음은 어찌 되었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이 만든 자아의 형상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우리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제목 '노멀 피플'에서 유추해 낼 수 있다.
이 시선을 직장인에게 투영해본다.
그대로 부합이 된다.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는 자의보다는 타의가 더 개입된 가면이다. 여기에, 신입사원부터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임원이라는 여러 개의 역할과 가면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나 자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나'일 뿐인데,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그 페르소나에 따라 달라진다. 월급이라는 공통분모에 묶인 사람들은, 상대방의 원형을 그대로 보지 않는다.
이에,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더욱더 견고해진다.
각각의 직급에 맞추어, 그 역할을 해내야 하는 이유다.
몇 년 전 아끼던 후배가 퇴사를 했다.
업무 처리가 빠르고, 깔끔한 친구였다. 이러한 인재를 놓치는 게 회사에겐 얼마나 손해일까라는 생각까지 들던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퇴사 이유를 물었다.
"선배님, 저는 더 이상 다른 부서와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아요. 다들 왜 이리 싸우며 일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친구의 원형은, 소위 말하는 평화 주의자였던 것이다.
목표를 두고 서로 아웅다웅해야 하는 조직의 생리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즉, 나에게 주어진 가면.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 하는 그 괴리감에 결국 퇴사를 결심한 것이다.
'노멀 워커스(Normal Workers)'
독일 나치당원이었던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러나 그는 재판에서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해 공분을 자아냈다. 그가 재판정에 들어섰을 땐 그저 나이 든 중년의 남자였고, 자식들에겐 평범한 아버지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직장인으로서 깊은 사색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첫째, 직장에서의 페르소나(역할, 직급, 직책 등)를 걷어내면 모두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둘째, 자신의 페르소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행하느냐에 따라, 내 인격과 삶에 큰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셋째, '나'와 '내가 아닌 나'의 괴리감 사이엔 내 '원형'이 있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페르소나를 벗겨보면 어떨까?
그저 보통사람들일 것이다. 누군가의 엄마, 아빠. 남편 아내. 자식 그리고 형제. 그러나 그 역할 가면을 벗기면 회사는 절대 굴러가지 않는다. 회사는 시스템이고 조직이다. 개인의 인격은 잠시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대 공동 운명체다. 그러니 서로의 가면은 두껍고 무겁다.
이것이 바로 '노멀 피플'이 해내야 하는 '노멀 워커스'의 역할이다.
'노멀 피플'과 '노멀 워커스'사이
나는 'Normal'이란 단어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보통'이란 말 안엔 '사람의 본성'이 녹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감 때문에 '보통'이란 단어를 그저 그렇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본성이 녹아 있는 그 말은 사실 매우 무섭고도 묵직한 단어다.
사람의 본성엔 선함과 배려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열등감이다.
같은 월급쟁이들끼리 서로 돕고 살면 될 텐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물어뜯으며 일하는 조직의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므로, 착한 사람도 성질을 내고 순했던 사람도 악해지고 독해진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멀 피플'과 '노멀 워커스', 즉 '나'와 '내가 아닌 나'를 오가며 우리는 괴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 괴리감 속에서 회의하며, 그 회의감 속에 슬럼프와 번아웃이 찾아온다. 더 나아가서는 진정한 자신인 '원형'을 잃어가는 무서운 결과를 맞이 하기도 한다.
'나'는 그대로이지만, 조직의 변화와 내 개인의 성과에 따라 나는 '핵인싸'가 되기도 하고,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선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항상 잘 나갈 수도 없고, 항상 바닥을 기는 일도 없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찾고 확립하는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면, '나'와 '내가 아닌 나'를 오가는 그 괴리감 사이에서 덜 흔들릴 수 있다. 업무를 위해서라면 의도적으로 화를 내야 할 때도 있고, 의도적으로 비굴해지기도 해야 하는 것. 그러니까 그 혼돈과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 한은 그것들을 잘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선 '진정한 나 자신'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그 둘 모두가 내 안에 있다고 해석한다.
우리 모두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외향적인 것과 내향적인 것의 기준은 그 둘의 비율이지, 극단적으로 어느 한쪽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비율은 내 기분과 감정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시시각각 변한다.
그 혼돈과 괴리감 속에서 분열되는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조금은 더 성숙한 나 자신이라는 원형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는 평생 직장인의 페르소나를 쓸 수 없다. 언젠간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 직장인일 것처럼 살고 있고, 그 모든 짐을 안고 가려한다.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를 걷어 내었을 때 나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여 내가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힘들게 연기하여 받아낸 것이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보통 사람인 나에게 성장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분명하다.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걸 경험하게 해주는 아주 좋은 기회란 걸. '나 자신'을 잃어 페르소나의 노예와 괴물이 되기보단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장의 발판으로 지금 주어진 일에 임해보는 것이 그것이다.
직장인의 페르소나, 그 무거움을 느껴야 한다.
그것을 느끼는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자 '원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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