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안전 운전과. 모두의 직장생활을 응원한다!
운전과 직장생활의 공통점?
나는 운전을 할 때면 직장생활을 떠올린다.
또 어느 땐 반대로 직장생활을 하며 운전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본다.
당연한 이유. 그 둘엔 공통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은 무엇에 기인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것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 있는 '마음의 요동'. 초록색 신호 하나에 기쁘고, 끼어든 차에 분노하고, 초보 운전자에겐 동정을, 뻥 뚫린 길에선 세상을 다 얻은듯한 그 감정들이 직장에서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
직장생활을 하며 하나하나 떠오른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운전을 하다 보면 상식 이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어떻게 면허를 딴 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걸까. 근본적이고도 합리적인 의심이 훅 하고 올라오게 하는 사람들이 꼭, 어디에나 있다. 그 사람들은 운전이든, 직장생활이든 간에 우리의 피로도를 높인다. 그런 사람이 상사라면 스트레스의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도로 위 내 주위의 차들을 선택할 수 없듯이,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내 동료와 팀 그리고 조직을 선택할 수 없다.
인연과 악연을 두루 넘나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지내야 한다. 그것을 어찌하려는 순간, 또는 그것을 어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는 순간 직장생활은 더 고단해진다.
말 그대로, 도로 위에서 사고가 났다면 쌍방 과실이다.
물론, 요즘엔 과실 체계를 손봐서 100% 과실도 나오는 추세다. 그러나 여전히, 쌍방과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은 양보를 하려 하지 않거나, 전방 주의를 하지 않을 때 사고는 일어난다.
상대방이 아무리 몰상식한 운전자라 해도, 어쨌든 사고가 났다면 나는 엮이고 만 것이다. 억울해도, 그 차가 90% 이상 잘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결론은 '쌍방과실'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직장은 개인 간, 부서 간의 '갈등'으로 굴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등'은 두 사람 사이에서 튀는 불꽃인데, 이 또한 '쌍방과실'이다. 나는 억울하다고 말하겠지만 양보를 하지 않으려던 마음. 내가 맞다는 일방적인 마음.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전방 부주의가 바로 쌍방과실의 증거다.
직장에선 갈등이 생기는 걸 두려워해선 안된다.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는 그저 내 갈길을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3대의 차가 나를 연달아 충돌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운전은 이처럼, 나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아무리 내가 운전을 제대로 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달려와 박으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방어운전이 필요하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방어운전은 마지막까지 내가 쥐고 있어야 할 최선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나 하나만 잘 살면 될 것 같지만, 어처구니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친한 친구일 수도 심지어는 같은 팀의 누구일 수도 있다.
'방어운전'처럼 '방어 인생'이 필요하다.
물론, 내 갈길 가다 뒤에서 받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어 운전하며 직장인의 삶을 몰아가야 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엔, 과함이 없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대형 고급 승용차와 경차가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출발하지 않았다. 그때, 뒷 차는 얼마 만에 경적을 울릴 것인가란 실험이었다. 결과는 극과 극이었다. 경차 뒤의 차들은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경적을 울려댔지만, 대형 고급 승용차 뒤에 있던 차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경적을 울리거나 심지어는 알아서 우회하는 차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의 껍데기로 대상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 껍데기를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직장에서의 껍데기는 내 '직급'과 '직책' 그리고 해야 하는 '업무'다. 개인 사정은 뒷전이다. 내가 아무리 고유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직장인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고 그 껍데기에 맞추어 사람들은 서로를 응대한다.
비인간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직장에선 서로를 '직급'과 '직책'에 따라 서로를 '대상화'해야 하고, 그래야 회사는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 위의 차들은 모두 목적지가 있다.
목적지가 없는 차들은 없다. 장소를 정하지 않고 드라이브를 나온 차도, 언젠간 집을 향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삶의 목적지가 있다.
그것은 각자가 정한 삶의 방향일 수도 있고, 추구하는 신념일 수도, 공통적으로는 죽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내 목적지는 어디일까? 내 삶의 내비게이션은 나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고 있는가?
직장생활의 끝엔, 그 어떤 다른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각각의 차들은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다르다. 그 다름의 얽히고설킴은 갈등을 일으킨다. 내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차, 계속해서 걸리적거리는 차.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를 빨간 불에 남겨 놓고, 혼자 쌩하고 달려 나가는 앞 차.
나를 방해하는 차들은 도로에 널렸다.
그러나, 그 차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일 뿐. 각자의 길을 가다가 의도치 않은 방해를 주고받는 게 직장 생활이다. 그러니까, 오늘 나에게 피해를 줬던 어느 한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은 그것을 의도했다기 보단, 그 사람이 가는 길목에 내가 있던 것일 수 있고 반대로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우연히 겹쳐 갈등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은 그저 그의 일을 했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
삶에 있어서 적은,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이들이다.
왜 내 차선만 이리 막힐까.
옆 차선으로 핸들을 돌린다. 뒷 차의 눈치를 뚫고 어렵게 차선 변경을 한다. 성공했다는 안도의 마음도 잠시. 내가 떠나온 차선의 속도가 빨라진다. 이젠, 눈치가 보여서 다시 그리로 가지 못하겠다는 찰나, 그 차선에서 내 뒤에 있던 여러 차들이 나를 앞질러 나간다.
우리네 삶은 언제나 그렇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삶이 쉬워 보인다. 내 인생은 지루한 롱테이크 컷이지만, 남의 인생은 재밌는 편집본이자 예고편이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
나보다 더 빨리 진급하는 사람.
나보다 더 빨리 탈출하여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잘 잡는 사람.
뒤처진다는 느낌은 직장인의 고질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를 가로막는 건, 다른 차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걸리는 빨간 불 앞에 나는 분노한다. 가뜩이나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땐,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야속해도 이렇게 야속할 수 있을까. 세상은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빨리 나오지 않은 내가, 빨간 불이 켜지는 그 순간에 그곳에 있는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호등은 언젠간 바뀐다.
유독 내게만 길게 느껴지는 내 앞의 빨간 불도 정해진 시간 안에 바뀌게 되어 있고, 내가 가고 싶지 않아도 녹색불은 들어오게 되어 있다.
마치 신호등이 바뀌지 않을 것같이 분노하고 조급해하는 건 내 삶에, 영혼에, 건강에 적신호를 켤 뿐이다.
지지부진한 내 직장생활이지만,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올 때도 있다.
빨간 불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신호등의 변화와 그 반복 속에 직장생활은 꾸역꾸역 지나간다.
운전을 할 때 내겐 빨간불이 보행할 땐 초록불이다.
보행할 땐 초록불이 운전할 땐 빨간 불이다. 사람은 간사해서, 운전할 때와 보행할 때 초록불이 켜지는 시간이 단축되길 바란다. 그 둘의 단축은 상충이자 패러독스다.
더불어, 내 신호와 네 신호는 다르다.
나와 같이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신호를 보지만, 보행자라면 반대의 신호를 본다. 보행자에게 왜 너는 나와 반대로 신호를 보고 있냐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상대방에게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말을 퍼붓곤 한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대의 신호는 무조건 내 것과 같다고 생각해 내뜻대로만 하려는 고집과 아집.
상대는 보행자의 신호를 보고 있는지, 운전자의 신호를 보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신호를 보고 있는지를 봐가며 살아야 한다.
서로의 신호가 다르듯, 서로의 KPI가 다르고.
또 서로의 목표와 상황이 다른 것이다.
나는 처음 운전할 때를 기억한다.
드디어 내게도 면허가 생기고, 드디어 내게도 차가 생기고. 언제라도 마음먹으면 드라이브를 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태우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그 기대감에 설렜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문명의 이기 안에서, 한껏 기분이 들떠있던 그때.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나는 치러야 하는 게 그토록 많다는 걸 깨달았다. 차 값, 기름 값, 보험료, 정비, 세차, 톨비, 세금 등. 더불어 맞이해야 하는 도로 위의 교통체증과, 상식 이하로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과의 실랑이까지.
그와 마찬가지로 직장생활의 시작엔 큰 포부로 마음이 충만했다.
드디어 돈을 벌고, 실력을 발휘하고. CEO가 되자는 다짐과 프로 '일잘러'가 되자는 기대.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는 자부심은 잠시.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목이 아닌 머리까지 차오르고, 냉엄한 현실과 월급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삶이 미래의 불안을 더 크게 만들어 갔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어찌 되었건 차를 타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
무섭다고, 두렵다고, 갈등이 생긴다고 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둘의 공통점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드라이브의 즐거움과 직장생활에서 맛볼 수 있는 성장과 보람의 순간들을 떠올려야 한다. 교통 체증에 갇혔다면 나는 차 안에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람되게 보낼까, 쉽지 않은 직장 생활에 갇혔다면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의 안전 운전과.
모두의 직장 생활을 응원한다.
쉽지 않겠지만, 서로의 목적지에 제대로 가 닿길.
갈등이 서로에게 상처가 아니라 배움이 되길.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자신을 알아차리는 날이 많아지길 바란다.
P.S
이 글도, 꽉 막힌 도로 위 차 안에서 생각하고 구상했다.
꽉 막힌 사람들로 힘든 직장생활의 와중에서도 이 내용들을 떠올렸다. 그 시간들이 내게는 더 이상 무의미한 게 아니라, 소중한 글감과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는 것에 대해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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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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