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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15. 2021

나를 관통하는 일하기란 무엇인가?

'나'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그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장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말 그대로 사랑과 미움이 공존한다.

'애(愛)'와 '증(憎)'의 승률을 따져보면 단연코 '증'의 압승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디론가 끌려가는 듯한 그 느낌. 출근하고 나면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른 채 탈탈 털린 영혼을 겨우 기워 터덜터덜 하루를 마감하는 반복의 날들. 금요일 밤 잠시 눈을 감으면 타임머신을 탄 듯 벌써 도착해있는 월요일까지. '증'의 범위와 힘은 넓고도 세다.


하지만 초심을 돌아보면 내 마음 가짐은 그와 같지 않았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입사를 하고 싶었다. 나에게 주어질 무대를 꿈꾸며 CEO가 될 거라고 입 밖으로 소리쳤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후대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겠노라고 가열차게 다짐을 했었다.


그것은 '애'였다.

분명코, 내가 바라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애'보다 '증'이 더 커진 것일까?

어떻게 하면, 현 상황에서 '증'보다는 '애'를 더 떠올릴 수 있을까?


답은 '직장'이 아닌 '일'에 있다.


2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직장'이라는 개념과 장소 그리고 조직에 '나'라는 존재 자체를 끼워 넣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내기 위해선 응당 그래야 한다. 직장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는다면 '나'도 없고 '직장'도 없고, 끝내 '월급'도 없다.


다만, 함께 떠올려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이다. 직장이라는 곳에 나를 욱여넣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아차리고, 그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직장생활에서 '애'는 정녕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직장내공]에서 '우리가 하기 싫은 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직장에 나가기 싫은 이유는 수십만 가지가 있지만, 그것은 적성이나 사람 또는 인정의 문제이지 '일'자체를 하기 싫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가만히 있질 못한다. 주변에 일을 그만두고 급속히 쇠약해진 사람을 많이 봤을 것이다. 나는 놀고먹을 만큼 돈을 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지, 내가 원하는 것만 해야지... 하지만 실제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 살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활동하고 일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직장'에 쏠려 있던 시선을 거두어 내 '일'을 좀 더 따듯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증'보다 '애'를 늘리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평일의 '나'도 나고, 주말의 '나'도 나다.


직장 생활에 진저리가 나서 일까.

사람들은 평일의 나와 주말의 나를 달리 본다. 직장에선 월급쟁이라 불행한 나.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니까 서러운 나. 평일의 나는 그렇게 유쾌하지 못하고, 처절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기지개를 켜며,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운다.

그러나 무한히 자유로울 것 같지만, 이내 월요일을 맞이하는 그 가냘픈 존재는 평일의 나에 밀려 또다시 자취를 감춘다.


이것은 '직장'의 개념으로 '나'를 규정할 때 생기는 부조화다.

일종의 자기 분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분열이 의도적으로 적정하게 합리적인 분산이면 괜찮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과 욕구불만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을 '일'이라는 매개체로 '나'를 이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주중의 '나'가 떳떳하고 당당해야, 주말의 '나'도 그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주중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데, 주말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주중의 일을 주말로 연장한다거나, 주말에도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주인의식을 계몽하거나 설파하는 게 아니다.


그 모든 건, 철저히 '나'를 위한 것이다.

'일'에 대한 의미는 어떤 누구도 내대신 찾아줄 수 없다.


나를 관통하는 일하기가 필요하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회사 오너 편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월급쟁이, 그러니까 여러분의 편이다. 그것도 철저히. 아주 철저히. 지금 나도 월급쟁이로 살고 있으니 경계를 풀고, 나를 믿어도 좋다.


'직장'이라는 개념만 생각할 때 나는 회사가 주인이고 나는 노예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 '일'이란 개념을 더해보니 뭔가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는 무슨 일을 해왔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일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뭐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잘하지 못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 일은 어떻게 해내야 하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면 나는 무얼 해야 하지?'


'일'에 초점을 맞추고 질문에 질문을 던지다 보면, 생각 외로 나는 더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 이후엔 주말에 일을 한다고 해서 억울해하거나, 평일에 늦게 퇴근한다고 세상이 불공평하단 생각을 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질문은 '나'에게로 향해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는 것도 나고, 해내야 하는 것도 나고, 그 모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나다.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 동안은 그 페르소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말의 나'와 '평일의 나'를 구분하기보단, '직장'과 '일' 그 두 개를 좀 더 철저히 구분하는 게 낫다. 아니, 그래야 한다. 무엇을 구분하고 나눌 것이냐에 따라 내 성장의 질은 달라진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나를 관통하는 일하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지 말되, 주중과 주말로 쪼개어진 나를 통합하여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일'을 해내며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좀 더 줄여보자면, '일'이란 의미를 되새겨 의미를 찾고, 그 의미로 '나'를 꿰어 통합하는 내적 성장의 과정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고 이룰 수 있는 곳이 바로 '직장'이라는 것이고.


내 일을 누구보다 뛰어나게 해낼 때, 비로소 나는 분열되지 아니하고 통합된다.

좀 더 안정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올라간다. 이것은 회사에 충성하고, 일에 미치고, 사무실에서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의미를 잘 소화했다면, 그런 오해는 생기지 않을 거라 믿는다.


'나'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그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관통하는 일하기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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