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에고버스(Egoverse)'로 가야 한다고 외친다.
인간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마지막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묵직한 질문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우리네 인류는 천국의 문을 열 수도, 지옥의 문을 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주의 작은 점과도 같은 지구는 어쩐지 인류에게는 작아 보인다.
차와 비행기가 없던 시대에는 지구라는 행성이 광활하고도 광활한 곳이었겠지만, 이젠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몇 개의 나라를 다녀올 수가 있게 되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존재에게 '촌'이란 그릇은 가당치가 않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 우글거리는 개미떼 앞에 크나큰 장애물을 놓은 것처럼, 인류는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양새다.
인류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유니버스' 아니면 '메타버스'라고?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저 너머 하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된 아폴로호는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을 달에 내려놓았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라이스 대학교에서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 (We choose to go to the moon)"라고 공언한 지 7년 1개월 만이었다.
2021년 9월.
민간 우주 왕복선 스페이스 X에 탑승한 인스퍼레이션 4 승무원은 15일 플로리다를 출발하여 18일 오후 7시경 미국 동부 해안에 무사 귀환했다. 이들은 순수 민간인으로 구성된 사상 첫 우주 궤도 비행단이었다. 미국 신용결제 회사 경영자인 크루 드래곤은 3명의 동행자를 선정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고 이 여행에 참여했다. 우주여행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이밖에도 인터스텔라나 마션 그리고 그래비티 등.
우주와 화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인기를 얻었고, 이는 실제로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는 걸 세상 모두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현상이 또 하나 생겨났다.
막다른 골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가 하늘마저 바라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마치, '나는 지금 여기 갇혀 있지만, 내 마음은 어디 자유로운 곳을 뛰어다니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이것을 '메타버스(Metaverse)'라고 부른다.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 또는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성한 말이다. 한 마디로, '가상 세계'를 말한다.
'메타버스'는 1992년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소설 '스노우 크래쉬'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소설에서 닐 스티븐슨은 사람의 눈에 3차원 영상을 투사하여 실제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메타버스를 정의했다. 소프트웨어 조각들을 통해 표현하는 실존하지 않는 그래픽. 우리가 지금 착용하는 VR 고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전 세계는 메타버스 플랫폼 전쟁 중이다.
로블록스나 제페토는 선봉에 선 메타버스 기업이다. 이미 주식 시장에선 이들의 급등세가 현실화된 지 오래다. 손에 잡히지 않는 가상이, 실제로 천문학적인 돈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에 열광한다. 경제 가치로 치환된 메타버스의 질주가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갈 곳은 과연
'유니버스'와 '메타버스' 뿐일까?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 가상현실에서 위로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말 그대로 VR 만능주의가 도래한 미래다. 모두가 고통받는 시대에서, 오아시스라는 VR 게임에 접속하면 뭐든 될 수 있고 또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나 VR 고글을 벗으면, 다시 암울한 현실로 사람들은 돌아오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유니버스? 메타버스? 유발 하라리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막다른 갈림길에 서있는 것만 같다. 어떤 게 천국이고, 어떤 게 지옥일까?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답을 모를 땐, 질문을 바꾸면 된다.
이 질문에 나는 과감히, 우리는 '에고버스(Egoverse)'로 가야 한다고 외친다.
가상의 세계에 흔적을 남기려고 동분서주하는 우리. 미지의 세계라 불리는 우주를 바라보며 중력을 이겨내고 날아가려는 인류. 우리의 생각과 지성 그리고 영혼은, 그래서 그 양단의 세계에 걸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다.
'유니버스'든 '메타버스'든.
그 어느 것도 자의에 의한 게 아니다.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시도된 제삼자의 도전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에. 우리는 어쩌면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영화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명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다음 내가 선택해야 할 세계는 무엇인지.
이것을 선택하고 이어가기 위해선, '나'라는 우주를 먼저 탐험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 없이는 그 어떤 세계를 선택하더라도 그곳은 지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에고버스'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그 우주를 탐험해야 하는지를 논하려 한다.
바다는 마르면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두순학, 당나라 후기 시인 -작가 주 -)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가 없다.
(뉴턴)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사람이라는 우주.
그러니까 '에고버스'는 '유니버스'와 '메타버스'보다 더 큰 우주다. 유니버스와 메타버스에 홀려 있는 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더 큰 우주. 그 우주를 유영하며 얻어내는 것들이 우리에겐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 확신한다.
'나를 뺀 우주'와 '나'의 무게 중, 어떤 게 더 무거울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혹시 그 답이 나와 같다면, 이제 함께 '에고버스'를 유영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