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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06. 2022

디지털 자아라는 불편한 진실

'자아(自我)'란 글자 그 자체가, 스스로 내가 되어간다는 뜻이므로.

두 가지 삶


'사회적 역할'이라는 개념으로 '페르소나'를 정리하면 우리는 수 십, 수 백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장인, 사업가 그리고 학생이라는 역할은 물론 아빠, 엄마 그리고 아들 딸이라는 가면까지 헤아려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이 두 배 더 늘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현대인은 또 다른 영역에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다.


'나'에 대한 것을 온라인에 남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온라인에는 '디지털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한국인들은 지난해 10월 사상 처음으로 1인당 월 데이터 소비량 8GB를 초과했다. 그마만큼 우리는 온라인의 세계에 많은 것을 남기고 있다. 예전과 같이 퇴근이나 학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온라인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 세상에 빠져든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과기정통부가 발간한 인터넷 이용 실태를 보면, 만 3세 이상 인터넷 이용자 중 하루 1회 이상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의 비율은 96.4%에 달하고, 주 평균 14시간 이상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전체의 54.9%에 해당한다. 


스마트폰 기준으로 보면 그 비율은 더 높아진다. 97.8%의 사람들이 하루 1회 이상 온라인에 접속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구축된 '디지털 자아'


먼저 '자아'란 말을 들여다보자.

'자아'는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말한다. 그러니까 '디지털 자아'가 구축된다는 말은 우리의 감정과 신념 등을 스마트폰과 온라인 세상에 결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가상의 자아는 그 '격'이 더 높아지면서 현실의 자아와 동일시되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초연결 사회에서 디지털 자아의 정체성 연구'에 따르면, 디지털 자아는 개개인이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면서 남긴 개인정보나, 활동 정보를 통해 분석해 제삼자가 제시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판단했다. 초연결 사회에서 타인에 의해 재구성된 '자아'라는 뜻이다.


이제는 이 디지털 자아가 현실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세계와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는 융합의 단계가 된 것이다. 현실의 자아가 온라인으로 들어가 디지털 자아를 만들고, 이 디지털 자아는 다시 현실 세계의 나를 대변하는 순환 고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다시 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발표 자료로 돌아가 보면.

10대에서 40대까지의 응답자 모두는 현실에서의 모습과 온라인에서의 모습을 동일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40대는 오프라인에서 구축된 자신의 정체성을 온라인에 반영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30대는 그 둘의 삶을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재밌는 부분은 10대에게 이 질문은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왜 온라인과 오프라인 정체성을 구분 짓냐는 것이다. 친구를 만들어 게임을 함께 하는 세대가 아닌, 가상의 공간에서 게임을 하며 그곳에서 친구를 만들어 가는 지금의 세대이기에, 그 반응이 십분 이해되고도 남는다.


메타버스 시대,
'자아'는 누가 만드는가?


온라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이 현상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인류는 무언가를 개념화하여 정의하고 그것을 이데올로기화 하는데 관심이 많다. 온 세상을 아우르는 온라인 시대. 그 속에 존재하는 디지털 자아. 현실의 세계에서 다 나아갈 곳이 우주 말고는 없다는 강박관념은 결국 '가상의 세계', '가상의 우주'를 만들어 내어 그 이름을 '메타버스'라고 지은 것이다.


결국, '메타버스'는 없던 걸 만들어 이름 붙인 게 아니라 작금의 우리네 삶을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메타버스라는 말을 활성화시키려는 주체들의 의도다.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면, 과연 우리의 '자아'는 누가 만드는가?

그리고 그 '자아'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름의 답을 나열해보자면, '자아'는 '나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앞서 '자아'는 내 '생각'과 '감정'이 외부와 접촉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생각'과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아무리 4차 혁명 시대일지라도, 초연결 사회일지라도. 우리는 남의 생각과 감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각자의 자아는 각자의 고유한 자아로서 존재해야 한다.


더불어, 자아가 형성되었다고 한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다. 자아는 고정값이 아니라, 삶을 통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무형의 형이상학적 무엇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절대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 말은, 평생을 가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자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명쾌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디지털 자아'는 좀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자아'보다 더 심오하게 말이다.


메타버스의 활성화와 내 디지털 자아의 상관관계 속에서.


디지털 자아는 누가 규정하는가?


앞서 말한 두 가지 명제를 기억하면 좋겠다.


- '자아'는 내 생각과 감정으로 세상과 접촉하며 형성해가는 나라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이다.

- '디지털 자아'는 제 삼자가 제시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며, 타인에 의해 재구성된 '자아'다.


이 둘의 차이를 알아챘는지 모르겠다.

내 '자아'는 내가 만들어가지만, '디지털 자아'는 온라인 세상에서 보이는 나를 누군가가 정의한 것이며 또는 내가 남긴 흔적들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무섭게 다가온다. 나를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는데, 다른 곳의 어느 자아가 또 하나 생기고 그것을 내가 주체적으로 만들어 간다기보단 누군가에 정의되고 또 무언가에 의해 재구성된다니.


더 주의해야 할 부분은 바로 '디지털 자아'는 누군가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누구인가? 바로 기업이다. 아마도 기업들은 신이 나있을 것이다. 과거 오프라인에서 타겟 하던 고객들이 온라인에 유입되고, 그렇다고 오프라인의 소비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 그것은 수요 증가로 이어진다.


실제로, '메타버스' 플랫폼들은 이미 수익구조를 다변화하고 있다.

가상 세계의 놀이터를 내어 주지만, 그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우리 디지털 자아는 추적당하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사고 싶어 하는지 시시각각 분석하고 있다. 그러니까 '디지털 자아'는 기업 입장에서 아주 반가운 하나의 'Segmentation(세그멘테이션)'이다. 그리고 어떤 세그멘테이션을 공략할까 고민하며, 'Targeting(타겟팅)'을 하고 있다. 


자신의 호불호를 분명하게 내어 놓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디지털 자아를 통해 여러 가지 떡밥을 흘려댄다. 

기업들은 이것들을 줍줍 하여 데이터 베이스화한다. 


그러니, 기업과 플랫폼은 메타버스라는 공간으로 어서 빨리 와 '디지털 자아'를 만들라고 종용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될 테니까 말이다. 잘 모르겠으면 디지털 자아를 만들어주겠다고도 한다. 사실, 메타버스 속 우리 얼굴과 몸 그리고 옷가지들은 이미 플랫폼이 정해준 것들이다. (남들이 덜 가진) 더 좋은 것들은 실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그 모습을 우리는 '자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자아라는 불편한 진실


사실, 오프라인에서의 내 '자아' 또한 경제 논리에 오염된 지 오래다.

기업은 '자아'를 활용한 마케팅에 전념해왔었다. '자아'의 집합체인 '세대'를 활용하는 건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X세대를 위한 마케팅, MZ 세대를 위한 프로모션 등. '당당하고 자신 있는 당신'이라는 키워드는 자연스럽게 '멋진 고성능 자동차'와 연관되고, '누구보다 일에 열정적인 당신'은 한도가 끝없는 '신용카드'와 직결된다. 


온라인에선 이런 구분과 연결이 더 용이하다.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떡밥을 기업에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 브랜드 운동화를 한 번 검색했을 때, 그걸 살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배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식별/ 비식별' 데이터를 기업체에게 넘겨주고 있다.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온라인에서의 우리 행태가 분석되고, 갖가지 광고와 배너의 표적이 된다.


때론,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듯이 이것저것을 추천해주는 그 알고리즘이 상당히 불편할 정도다.




정리해보면, '디지털 자아'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단 기업과 플랫폼의 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오프라인에서의 자아든, 디지털에서의 자아든. 그것을 내가 잘 수립하고 관리한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자아'형성 그 자체도 쉽지 않은데,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자아가 '디지털 자아'로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자아 또한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자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꽤 달콤한 유혹이다.

대부분은 내 '자아'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순 없기 때문이다. 영화 '김 씨 표류기'에 나오는 정려원의 캐릭터를 떠올려 보자. 현실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지만, 온라인 상에선 그 누구보다 스타일리시하고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디지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내 자아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또 다른 자아에 집착하는 모습이 단순히 하나의 영화 캐릭터라고 하기엔 우리네 현실이 너무나도 영화와 같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면, 특히 '자아'에 있어선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디지털 자아에 집착하기 전에, 현실에서의 내 자아를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가능한 그 둘의 간극을 줄여 가되, 필요에 따라서는 그 간극의 정도를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능력은 바로 지금의 내 '자아'를 잘 이해할 때 가능하다.


오늘의 내 '자아'를 살피고, 보듬어야 하는 이유다.

'자아(自我)'란 글자 그 자체가, 스스로 내가 되어간다는 뜻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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