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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14. 2022

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개그맨으로서 제일 슬픈 건
감을 잃을 때


한 TV 예능에서 송은이 씨가 "개그맨으로서 제일 슬픈 건 감을 잃을 때"라고 말했다.

언제가 가장 힘드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내가 예상한 답은 바로 '무대가 없을 때'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감'을 먼저 이야기했다. 


그녀는 왜 '무대' 보다 '감'을 먼저 이야기했을까?

그 답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감은 있지만 무대가 없으면 감이 떨어진다."


언젠가 개그맨 김숙 씨가 갑작스럽게 방송 촬영 전날 하차 통보를 받은 적이 있었다.

홧김에 하와이로 가겠다는 걸 송은이 씨가 말렸는데, 뭔가 재밌는 걸 직접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그때 송은이 씨가 생각한 게 바로 '감을 잃지 않으면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무대보다 중요한 건 바로 '감'이었다. '감'을 위해 그들은 스스로 무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팟캐스트는 이후 라디오 방송으로 확장이 되었고, 수많은 예능 포맷의 시초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그녀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뭐라도 했다.

무대가 없다고 불평하는 게 아니라, 무대를 만들었다. 프로그램이 없다고 좌절한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했다.


그 방송을 보며 나는 내 '감'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를 돌이켰다.

그날의 예능은 나에게 다큐였다. 폭풍과 같은 생각이 머리를 휘저을 정도의.


내가 떠올려야 하는 '감'은 무엇이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송은이 씨가 말한 '감'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소명'으로 해석한다. 내 결론은 그것이다. 소명이란 말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종교적 색채도 있어 일종의 운명론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람도, 힘든 일이 닥치면 하늘을 보며 두 손을 모으지 않는가. 우리네 인생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들과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소명'이란 말을 음미해보자.

새롭게 보일 것이다. 내 삶의 '소명'은 무엇일까를 자문하게 될 것이다. 송은이 씨의 소명은 무엇일까? 그녀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녀가 가진 끼와 재능으로 이미 그것을 알고 그 소명을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그녀의 일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으니까. 소명을 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행한 것들이 소명으로 해석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지금도 그녀가 해야 한다고 믿는 걸 실천하고 있으니까.


다시 내 것을 생각해본다.

내 소명은 무엇일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직장인에게도 소명 따위가 있을까? 소명... 따위... 라. 생각부터가 글러 먹었다. 직장인에게 소명이 있으면 안 되는 건가? 다달이 받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에게 '소명'이란 말은 가당치 않은 말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나 자신은 초라해졌다. 왜일까? 직장인이란 페르소나가 왜 이토록 처절하게 초라하게 느껴질까?


질문이 틀렸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소명'이란 말은 과분하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0여 년이 넘는 직장 생활 동안 월급이 끊긴 적이 없다. 그 뜻은 무엇일까? 월급이 꼬박꼬박 해서? 아니다. 내가 꼬박꼬박 했다. 꼬박꼬박 출근하고, 꼬박꼬박 욕먹고, 꼬박꼬박 일을 해내고 퇴근을 해냈다. 지금도 그렇다. 직장인인 나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존재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감을 잃고 있던 것이다. 




나는 '소명'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 생각한다.

더불어, '소명'을 내 본업과 별도로 생각하던 내 관점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소명은 매우 특별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결국, '소명'은 본업에서 흘러나온다. 좋든 싫든, 본업에서 배운 것이 내 자산과 역량이 된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이 있다.

결국 내 본업이 내 소명의 근간이 된다. 나는 그 근간을 다시 '업(業)'으로 규정한다. '본업'에서 '업'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업'은 끝내 '소명'이 된다. 그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무수한 힌트들이 바로 '감'이다. 내가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게으른 내가 꾸준하게 해나가고 싶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가슴이 나를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라고 시키는 그 무엇. 때론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안에서 '업'의 의미를 찾는 것. 그래서 결국 내가 이루고 싶은 '소명'을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감을 찾으려는 노력


성경 구절에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란 말이 있다.

내 삶은 악인과 같았다. 그저 팔랑였다. 중심이 없었다. 감이 없었다고 말해도 좋다. 왜 사는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저 기분 좋은 행복만을 좇았고, 그저 남들 따라가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기 위해선 내 주위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어질러진지도 모르고 살던 내 방이 한없이 지저분해 보일 때. 일어나 그것들을 조망하며, 내가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아왔던가... 란 놀라움을 마주할 때. 비로소, '자아'를 한 발자국 떨어져 메타인지 하는 그 순간. 깨달음은 언제나 순식간이다.


내 주위 어질러진 모든 것들은 내 소비로 인한 것이었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려, 나는 방황하고 있다는 마음을 숨기려. 내가 산 것들은 물건이었지만, 내가 바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물건들이 많아지고, 다른 이들의 콘텐츠를 소비하면 할수록 나 자신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중심 없는 소비는 그렇게 스스로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생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 말고 생산. 나 같은 사람이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을까? 작아진 나는 더 작아진 나에게 물었다. 물음표가 올라왔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나 따위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감을 잃지 않고 싶었다.

아니, 내게 있어 감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나'라는 감


나는 평생 나와 심하게 싸워왔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나는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삶은 지금보다 나은 삶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결심과 실천이 필요했다. 그러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나 실천이 문제였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삶을 실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비난하는 그 순간, 그렇다고 나는 실천을 하진 않았다. 악순환이었다. 나를 뭉개고, 실천은 하지 않고. 삶은 내가 바라지 않는 쪽으로 흘러가고 또 흘러갔다.


그러다 생산을 하고 싶단 생각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써 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다. 그러나 시작했다. 그저 시작했다. 실천하지 못하는 내가 두려워 목표를 두지 않고 시작했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손가락질할 또 다른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이 하나 둘 쌓였다. 일 년 후, 쓰레기면 그것을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글쓰기는 나에게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간절함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나'에 대한 미련이었을 것이다. 나를 알고, 발견하고, 치유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싶었던 것. 


그 간절함이 통했을까.

쌓인 글은 내 자산이 되었고, 그것은 책과 콘텐츠로 많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이 되었다. 더불어, 그것은 나에게 경제적은 물론 직장생활 이후의 삶의 모습까지 제시하고 있다. 


나는 다시 '본업'이란 말을 떠올린다.

내가 쓴 글과 책은 모두 '본업'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본업'에서 배운 역량과 스킬을 글쓰기와 출판, 그리고 강의에 모두 사용하고 있다. 비로소 나는 '본업'에서 '업'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나에게 '소명'이 되었다.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감'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를 알아가고 발견하고 계발시켜 나갈 때, 기회는 온다고 나는 믿는다. 




송은이 씨는 백상 예능상을 수상했다.

수상 직후 김숙 씨는 송은이 씨에게 장난 삼아 '백상 깜'은 아니라며, 사람들이 (방송가에서) 버티면 언젠가 된다라고 말했다며 놀렸다. 그러자 송은이 씨는 "야, 버티는 것도 쉽지 않아."라고 말하며 말 그대로 26년을 버텨온 그녀의 진심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응수했다.


삶은 버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26년이 아니라, 평생을 버텨야 한다. 그러나,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나'라는 '감'을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이루어야 하는 것, 내가 하기 싫은 것, 내가 해야 하는 것. 그것들 사이에 '나'라는 '감'이 있다.


나는 누구보다 나에게 뛰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스로를 얕보거나, 스스로를 작게 만든다면. 우리는 감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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